판단과 환상의 고귀한 자손인 건축은
아시아, 이집트, 그리스 그리고 이탈리아의
가장 고상하고 교양 있는 나라들에서 서서히 형성되었다.
가장 번성하는 국가들과 가장 유망한 군주들이
건축을 소중히 여기고 높이 평가하였다.
그들은 방대한 비용을 들여 건축을 개선하고 완벽하게 만들었다.
건축은 여타의 모든 예술보다 질서, 비례
그리고 대칭에 특별히 능통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건축은 어느 면으로 보아도,
우리가 아름다움 속의 형언할 수 없는 것에 관한
어떤 합리적인 관념을 품는 데 도움을 줄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추정될 수 있지 않겠는가?
-조지 버클리, 알키프론
"미학자로서 칸트는 최초의 ‘형식주의자’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대략적으로 말해서 이것은 칸트가 예술작품이 그것의 문화-정치적 맥락, 예술가의 이력, 예술 작품이 품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개념적 의미와 단절될 뿐만 아니라 관객에게 미치는 모든 정서적 영향과도 단절된, 자족적이거나 자율적인 단위체로 여겨지기를 원했음을 뜻합니다. 주지하다시피 칸트는 우리에게 지성보다 오히려 ‘취미’를 사용하여 예술 작품을 판단하고, 무엇이든 정명과 유사한 것보다 오히려 냉정한 무관심으로 예술 작품을 바라보라고 요구합니다. 미합중국에서 이런 칸트주의적 견해의 가장 유명한 계승자들은 20세기 형식주의 비평가 클레멘트 그린버그와 마이클 프리드입니다. 특히 프리드는 그가 ‘연극성’이라고 일컫는 것을 이유로 1969년대 이후의 미술을 대부분 거부합니다. ‘연극성’이란 칸트가 세울 것을 권장한, 작품과 그 감상자 사이의 벽이 붕괴해 버렸음을 뜻합니다. 칸트 및 프리즈의 미학 이론들이 대단히 훌륭하다고 평가하는 제 견해에도 불구하고 「예술과 객체」에서 나는, 예술의 자율성에 대한 칸트주의적 요구가 필수적인 것이지만 이것은 예술 작품의 그 감상자로부터의 자율성을 뜻하지 않고 오히려 작품-더하기-감상자의 그 주변 세계로부터의 자율성을 뜻해야만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달리 말씀드리자면 예술은 직서적이지 않은 한에서 연극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요컨대 예술 작품은 결코 개념적 용어들에 의거하여 환언될 수 없습니다."
“(칸트는) 건축이 유용성으로 오염되어 있기에 순수한 아름다움의 지위에 오를 수 없다고 믿었습니다. … 일단 우리가, 프리드에게 맞서서, 감상자가 연루되지 않은 시각 예술은 이미 없음을 깨닫게 되면 기능이나 프로그램이 없는 건축은 전혀 없다는 사실이 훨씬 덜 위협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요컨대 건축의 경우에도 개인적, 사회적 목적들에 이바지할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자율성은 완전히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자율적인 건축은 어떤 모습일까요? 이것이 이 책의 주요 관심사입니다.”
건축에서 형태와 기능의 구분은 역사적인 논쟁거리이다. ‘Form follows Function’ 루이스 설리번의 준칙은 모더니스트 수중에서 거의 하나의 신조가 되었지만, 그 신조는 역사에 관심이 있는 이론가들의 새로운 세대가 처음 출현한 1960년대가 되어서야 파기된다. 건축의 포스트모더니즘과 함께 건축 장식이 부활한다.
“한 건축물의 시각적 외관은 언제나 다름 아닌 어떤 특정한 관점과 거리에서 보이는 것이며, 그리고 그 건축물이 ‘정말로’ 보이는 대로 언제나 볼 수 있는 특권적 관점은 전혀 없습니다. 더 일반적으로 건축물에 대한 경험은 시각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운동학적입니다. 우리는 어떤 건축물의 주위와 내부를 걸어 다님으로써 그 건축물을 경험할 따름이라는 의미에서 말입니다. 예전에 청년 아이젠만이 지적한 대로 이것은 건축이 기억에 근거를 둔 시간적 예술 형식임을 뜻합니다.”
그래서 청년시절 아이젠만은 기억하기가 더 쉽다는 이유로 단순한 기하학적 형태들을 옹호하였다. 하지만 하먼은 건축물의 자율적인 ‘제로-형태’를 발견하려면 직서적 개념에 의거하여 이루어질 수 없고 오히려 간접적으로 혹은 심미적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고 한다.
모든 기능은 반드시 관계적이기 때문에 ‘제로-기능’은 훨씬 불가능해 보인다. 여기서 하먼은 두 가지 방법을 제시하는데, 첫째는 원래 기능을 수행하지 않게 되는 기념비적 건축들이다. 역사상 어느 시점에서도 명료한 기능을 결코 갖지 못하는 사태들이 기능은 사실상 역사적 형태를 따름을 설명한다. 두 번째는 콜하스의 하부구조적인 건축이다. “건축물 설계를 무엇이든 어떤 특정한 목적과의 연결 관계로부터 단절함으로써 콜하스는, 단지 기능적이거나 프로그램적인 관심사에 대해서만 신경을 쓰는 그의 빈번한 수사법에도 불구하고, 흥미로우면서도 자율적인 새로운 종류의 기념물적 건축을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이 책에서 그레이엄은 본인의 객체지향존재론과 함께 자율적인 객체로서의 건축을 논한다. ‘제로-형태’, 그리고 ‘제로-기능’적인 건축들이 미래를 향한 해답을 어느 정도 제시해 줄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건축과 철학
철학은 역사적 시대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어느 한 시대의 철학자들의 주장을 살펴보면, 그 시대의 역사적 배경, 예술, 정치, 사상등 거의 모든 것을 꿰뚫어 볼 수 있다. 건축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지난 반세기의 건축과 철학의 관계를 살펴보면 그 영향이 지나치게 직서적이었다는 것을 아래의 트위터를 통해 엿볼 수 있다.
프레드 샤멘의 아이러니한 트위터 (1-4). (5,6)은 그레이엄 하먼이 추가한 것이다.
건축가들과 철학 (1) 레비-스트로스가 기표를 좋아했으므로, 역사적으로 공명하는 것들을 만들자.
건축가들과 철학 (2) 데리다가 차이를 좋아했으므로, 대립하고 충돌하는 것들을 만들자.
건축가들과 철학 (3) 들뢰즈와 과타리가 매끈한 연속체를 좋아했으므로, 섞이고 접히는 것들을 만들자.
건축가들과 철학 (4) 그레이엄 하먼이 망라될 수 없는 객체를 좋아하므로, 가변적인 윤곽을 갖춘 불가사의한 것들을 만들자.
(5) 하이데거가 인간의 존재 자체에의 개방 성을 좋아했으므로, 자연적 햇빛, 나무 그리고 돌을 강조하는 것들을 만들자"
(6) 프레드 샤메이 철학에서 영감을 찾아내는 건축가들을 조롱하기를 좋아하므로, 내부적인 전문적 공예에 집중하고 빈자와의 연대를 공표하자.
지금까지 몇몇 건축가는 지나치게 직서적으로 설계 업무를 철학적 관념들에 맞추어 조정했다. 이런 경고는 철학적 통찰의 과도하게 직서적인 전유와 적절히 건축적인 전유를 구분하는 방법에 관한 중요한 물음을 제기한다.
건축과 예술
미적 객체는 자신의 환경으로부터 단절되어 있다고 여겨지는 칸트의 ‘형식주의적’ 접근법과 그 환경의 요소와 표현으로 여겨지는 헤겔의 ‘반형식주의적’ 접근법으로 나눠질 수 있다.
“이런 기본적인 논쟁은 여전히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데, 그것이 구식의 지루한 논쟁으로 일축당할 때조차도 말이다. 대체로 동시대의 지적 생활에서 해방 정치가 지배적인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이유로 인해 현재는 반형식주의가 우세하지만 어떤 강한 형식주의를 옹호하기 위해 할 말이 많이 있다. 그 이유는 아무것도 여타의 것과 관계를 맺고 있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무것도 다른 모든 것과 관계를 맺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동일한 역사적 국면에서 상이한 분과학문들은 언제나 동일한 화음을 울리지는 않고 오히려 종종 비스듬한 방향으로 가변적인 속도로 움직인다. 공유된 시대정신에 대한 어떤 증거도 일반적으로 기껏해야 서너 분야에서의 유사성에 한정되며, 그리고 이마저도 입증하려면 시간이 오래 걸리는 노동과 방대한 단서조항이 필요하다. 달리 말해서 모든 것이 함께 조화를 이루어 움직이게 하는 일반적인 역사적 분위기를 상정하기 위한 근거는 전혀 없다. 자율적 개체들에 형식주의적 주의를 기울이는 이유는 모든 관계를 배제하는 기존의 물리적 단위체들을 높이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객체가 자신의 부분들 사이의 관계들로 이루어져 있고 일정한 수의 관계에 관여하는 한편으로 어떤 객체도 우주 속 다른 모든 것과의 밀접한 관계로 용해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진정한 형식주의적 원리는 객체들이 관계를 맺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관계의 수가 언제나 한정되어 있다는 것이며, 그리고 관계를 창출하려면 인간 혹은 비인간 노동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칸트는 근대 형식주의의 창시자임이 확실하지만, 이 주제에 관해서도 너무나 엄격하여서 여하튼 예술 작품과 환경 사이의 어떤 상호작용도 금지한다. 칸트는 인간과 말馬의 아름다움을 미심쩍게 여기는데 그것이 이미 외부적 동기와 완전히 얽혀있다고 간주하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인체에 대한 경탄은 위험스럽게도 정욕에 가까운 것처럼 보이고 아름다운 말 앞에서 느끼는 경외감은 그 동물의 빠름의 효용과 관련된 것처럼 보이며, 그리하여 둘 다 “한낱 부수적인 아름다움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진다.”
1장 | 건축가들과 그들의 철학자들
야네바는 행위자-네트워크 이론(이하 ANT)을 건축에 밀접하게 관련시켰다. “행위자들을 따르라”는 ANT의 준칙은 OOO의 영감이 되었다. 나무 혹은 사과가 단지 “성질들의 다발”에 불과하다는 데이비드 흄의 견해를 암묵적으로 수용하는 ANT는 행위자는 전적으로 자신의 행위들로 구성되고, 객체와 그것 자체의 성질들 사이에는 어떤 차이도 허용하지 않는 반면, OOO에는 실재적 객체, 즉 자신의 행위들의 총합으로 결코 망라되지 않는 은폐된 잔유물이 존재한다.
야네바는 건축 작품을 어느 순간에 응결된 완성품으로 구상하기보다는 오히려 진행 중인 역동적 과정으로 구상한다. 그들은 개별 건축물이 과연 건축적 분석의 적절한 단위체일 수 있는지를 의문시한다. 건축물은 “추상적이고 불변적이고 놀랍도록 고독하며 세계로부터 격리된 것”이라는 관념을 반대하며 “건축물이 다양한 방식으로 다양한 이질적인 행위자를 연결한다”라고 주지한다. 그들은 관계적 모형을 옹호하는 화이트헤드에게 찬사를 보내며 형태와 기능이라는 이분법에서 벗어나는 관계적 관점을 제시한다. 건축물은 명사가 아니라 오히려 동사이며 건축 미학은 “목소리들의 교향곡”과 같다고 한다.
건축적 객채를 그것의 조각들로 아래로 용해하는 것과 그것의 결과들로 위로 용해하는 것이 둘 다 그 객체를 제대로 다루는 올바른 방법인지의 여부를 OOO는 묻는다. “아래로 환원하기”와 “위로 환원하기”는 우리가 지식이라고 일컫는 것의 총합을 구성한다. 요컨대 ‘안다는 것’은 한 객체를 그것이 연루된 더 작은 존재자들과 더 큰 존재자들에 의거하여 분석함을 뜻한다. 그런데도 지식은 인간 인지의 권역을 망라하지 못한다. 한 가지 명백한 반례는 예술이라는 영역이다. 그리하여 건축을 행위자들의 복합체로 환원하고자 할 때 우리는 두 가지 실수를 저지른다. 첫째, 그 건축물을 생성하는 행위들 혹은 원인들이 모두 그 건축물 자체에 여전히 중요한 채로 남게 되지는 않는다. 둘째, 어느 건물의 역사에 관한 어떤 상세한 설명도 우리에게 결코 그 건물 자체를 제시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형태와 기능의 이원론을 넘어서는 방법은 그것들을 제한 없는 관계들의 안개로 용해하는 것이 아니라 두 개의 항 모두를 탈관계화하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이접보다 연결을, 명사보다 동사를, 생산물보다 과정을, 그리고 추정상의 정적 상태보다 역동성을 선호하는 동시대 담론의 경향을 거스르는 것임을 알고 있다.”
“모든 사물은 매 순간에 부분적으로 표현되지 않은 잉여이다. 모든 사물은 세계가 그것들에서 인식하거나 음미할 수 있는 것을 넘어선다. 그리고 우리가 한 사물을 그것이 어쩌면 관여할 수 있을 모든 활동과 같은 것이라고 구상하더라도 그런 행위들은 단지 그 사물이 자신의 가능한 용도들을 모두 뒷받침할 수 있는 잉여인 한에서만 가능하다. 이 책의 중심 테제 중 하나는 그 전통적 의미에서의 형태와 기능이라는 건축적 개념들은 줄다 위로 환원하는 용어들이라는 것이다. ‘형태’는 일반적으로 건축물의 ‘시각적 외관’ 같은 것을 뜻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이것은 건축물을 우리에 대한 그것의 외양으로 환원함으로써 그런 외양들을 가능하게 만드는 더 깊은 형태를 은폐한다. 한편으로 기능이라는 관념은 형태보다 훨씬 더 명백하게도 건축물을 그것이 특정한 목적들과 맺은 관계들로 환원하며, 그리하여 모든 특정한 책무에 선행하는 더 깊은 층위의 기능을 빠뜨린다.”
마르틴 하이데거
하이데거의 현상학은 우리는 어느 주어진 순간에 자신이 대면하고 있는 객체의 표면을 볼 따름이며, 그리고 그저 나머지 부분 역시 존재해야 한다고 가정한다. “하이데거가 보기에 대체로 우리는 세계의 사물들을 인식하지 못한 채로 그것들에 조용히 의존하며, 그것들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거나 방해물이 되는 경우에만 그것들을 인식하게 된다”는 것이 「존재와 시간」의 논점이다.
하이데거가 건축은 격자같은 데카르트 공간에 배치된 계산 가능한 객체들에 관여하기보다는 오히려 불가해한 사중체 사물들에 관여해야 하며, 인간은 객관적이거나 측정 가능한 의미에서의 공간에 대립하는 것으로서의 장소(locale)에 뿌리박고 있다. 객관적 공간보다 장소에 자리함이 바로 거주가 뜻하는 바이다. 거주는 “필멸자들이 존재자로서 현존하게 하는 존재의 유일한 근본 특성이다.”
유하니 필라스마는 눈과 마음을 감각에 맞서는 통일된 음모의 두 측면으로 간주한다. 동시대 예술 작품들은 “분화되지 않은 신체화된 반응과 감각에 대하여 고심하지 않고 오히려 지성과 개념화 역량에 호소한다”라고 말한다. “신체적 반응은 건축에 대한 경험의 불가분한 측면이다”라고 말하며 촉감의 중요성을 상기시키며 “시각적 지각도 자아의 촉각적 연속체로 융합되어 통합된다. 나의 몸은 내가 누구인지 그리고 내가 세계 속 어디에 자리하고 있는지 기억한다”라고 말한다.
노베르그-슐츠는 하이데거를 공공연히 인용한 후에 우리에게 “건축적 구체화의 의미는 … 구체적인 건축물의 의미에서 한 장소가 작동하게 만드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페터 춤토르의 “건축은 공간의 예술인 동시에 시간의 예술이기도 하다. 질서와 자유 사이, 어떤 경로를 따르기와 우리의 독자적인 경로를 찾아내기, 방황하기, 배회하기, 유혹당하기 사이의 예술이다. …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은 형태 자체에 의해 촉발되지 않고 오히려 형태로부터 나에게 도약하는 불꽃에 의해 촉발된다.”이는 OOO판본의 혼성 객체와 유사한 개념이라고 하먼은 말한다.
“아이젠만이 보기에 현상학의 선택은 우리의 세계와의 관계에 집중된 건축에 뛰어듦을 뜻하고, 그리하여 르네상스에서 역사적 포스트모더니즘에 이르기까지 지배적이었던 바로 그 ‘휴머니즘적’ 전통에 합류함을 뜻한다. 이 주장은 확실히 인상적이지만, 아이젠만의 형식주의는 칸트가 옹호했고 미술사가 마이클 프리드가 인간을 제거하는 것이 자율성의 핵심이라고 잘못 주장한 초기 시기에 옹호했던 그런 종류의 형식주의와 너무나 유사하다. 아이젠만의 건축 작업의 한 단계에서 이것은 의도적으로 잘못 배치한 기둥들과 그 밖의 장애물들로 인간의 편의를 적극적으로 전복시킴을 수반한다.”
하먼이 보기에 인간이 건축물을 경험함으로써 그것을 망칠 수 있는 역능을 갖추고 있다는 우려는 슬픈 얼굴을 한 휴머니즘과 같지만, 실제로 아이젠만이 비판했듯 현상학자들이 ‘매력’이라고 일컫는 것에 과도한 주의를 기울일 수 있다는 것이다. 실재에는 온도, 참나무, 은 그리고 부드럽게 돌아가는 손잡이에 대한 단순한 신체적 경험 이상의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망각하는 것이다.
“객체의 아름다운 외양적 모습에서 취미는 구상력이 그 시야 안에서 포착하는 것에 매달리기보다 오히려 구상력이 허구를 창작하도록 그 외양적 모습이 제공하는 계기, 즉 마음이 눈에 띄는 다양한 것의 자극을 끊임없이 받으면서 스스로 즐기는 현행의 환상에 매달리는 것처럼 보인다. 이를테면 벽난로 속 화염이나 잔물결을 일으키는 시냇물의 변화무쌍한 형태를 바라보는 경우가 그러하다. 이들 중 어느 것도 아름다운 것이 아니지만, 그것들이 여전히 구상력에 대해서 매력을 지닌 이유는 그것들이 구상력의 자유로운 운동을 지속시키기 때문이다.”
칸트, 판단력비판 94-5
“그런 구상적 매력이 놓치는 것은 모든 경험의 심층 차원, 즉 그것이 우호적인 자연적 재료를 통해서 직접 접근할 수 있기보다는 오히려 단지 암시할 뿐인 그런 차원이다. 하이데거에게 매우 심대하게 의존하는 전통에 대하여 얼마간 아이러니하게도, 건축 현상학은 풍부한 거주와 수많은 실존적 기반을 제공하지만 우리가 아이젠만 자신이 설계한 ‘학살된 유럽 유대인을 위한 기념물’의 심란하게 하는 공간을 걸음으로써 얻게 되거나 혹은 다니엘 리베스킨트의 대다수 작품에서 얻게 되는 것보다 훨씬 더 적은 불안을 제공한다.”
여기서의 불안이란 부정적인 요소가 아니고 오히려 마이클 베네딕트가 건축이 “체험주의”라고 일컫는 덧에 빠져들게 되는 사태에 관해 우려했듯, 건축이 장치로서 심층차원의 정신을 자극하는 것의 결핍이라고 해석될 수 있을 것 같다. 하이데거적 용어로써 ‘불안’은 내 안에 존재하는 타인들 속에서 본래의 나가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계기인 것이다. 여기서 심층 차원이라는 것은 휴머니즘에서 결핍돼있는 '내가 존재하고 지각하기 이전에 내 안에 들어와 있는 다른 사람의 존재'와 같은 것이다. 하이데거에게 존재의 진리란 섬뜩함이고 따라서 아이젠만의 메모리얼과 유대인 박물관은 데리다보다는 섬뜩함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건축을 통해 섬뜩함을 촉발함으로써 존재를 상기시키는 것이다.
자크 데리다
데리다의 철학은 베르나르 추미의 파리 라빌레트 공원과 함께 건축계에 등장했다.
러시아 아방가르드의 “낯설게 하기”는 “OOO의 ‘탈직서화’라는 관념과 공유하는 점들이 있지만, 우리는 최종 결과가 믿을 만한 것일 수 있으려면 친숙한 것과 직서적인 것이 낯설게 하기 효과를 부각하기 위한 바탕으로 작용할 수 있는 정도까지만 제거될 수 있을 뿐임을 유의해야 한다. … 『시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느 직서적 진술에서 너무 많은 평범한 낱말이 이례적인 낱말들로 대체된다면 그 결과는 한낱 수수께끼에 불과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그들을 심란하게 만드는 것은 그들이 친숙한 맥락 속에 이미 감춰진 낯선 것을 찾아내는 방식이다. … 한 프로젝트에서는 탑들이 그들 쪽으로 향하는 한편으로, 다른 프로젝트들에서는 교량들이 위쪽으로 기울어져 탑이 되거나, 땅에서 지하의 성분들이 분출하여 표면 위에 부유하거나, 혹은 평범한 재료들이 갑자기 이국적인 것이 된다.”
위글리, deconstructivst Architecture 17~8
러시아 구축주의자들은 이런 불안정성을 탐구하는데 더 많이 관여하게 됨에 따라 그들은 그것을 완화시킬 필요성을 더욱더 많이 느끼게 되었다. 당시 러시아의 사회적 요인과 건축적 추세등의 이유로 실험적이었던 러시아 아방가르드의 “전통의 상처는 곧 봉해졌으며, 단지 희미한 자국만 남게 되었다.” 그러나 해체주의 건축의 출현과 함께 위글리가 말하는 데로 “그 상처를 다시 개방했다.”
위글리가 보기에는 러시아 구축주의자들이 불안정성을 외면하는 이유는 그들이 매끈하고 능률적인 미학을 위해 장식을 제거한 것으로 유명한 “모더니즘 운동의 순수성에 의해 타락되”었기 때문이다. 모더니스트들의 기능주의적 명성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사실상 “기능 자체의 복잡한 동역학에 사로잡힌 것이 아니라 기능주의의 우아한 미학에 사로잡혀”있었다.
기능주의 모더니즘이 순수한 형태의 미학을 가능케한 철골 콘크리트 구조와 함께 출현한 점을 생각하면 위글리의 주장은 타당하다. 그 외에도 러시아 내에서 불안정성을 타파해야 할 정치적 맥락의 영향도 있었을 거라 생각된다.
위글리는 프로젝트들이 해체주의적이라고 일컬어질 수 있는 이유는 그것들이 구축주의에서 비롯되지만 그로부터 급진적인 일탈을 이루어내기 때문이라고 한다. 해체주의에서 새로운 것은 파격의 기하학이 “더는 단순히 순수한 형태들 사이의 충돌로 산출되지 않는다… 이제 그것은 그런 형태들의 내부에서 산출된다”라고 하며 “명백한 위협이 아니라 장식적 효과, 위험의 미학, 위기에 대한 거의 픽처레스크 한 재현을 산출”할 따름이라고 단순한 형식주의적 해체주의를 비판하기도 한다.
“모더니스트들은 형태가 기능을 따른다는 것, 그리고 기능적으로 효율적인 형태들이 반드시 순수한 기하학을 지닌다는 것을 주장했다. 하지만 그들의 능률적인 미학은 현실적인 기능적 요구사항들의 난잡한 실재를 무시했다.” 이렇게 해서 위글리는 해체주의자들의 경우에 “형태가 기능을 따르는 대신에 기능이 변형을 따른다”라는 대담한 표어를 표명하게 된다.
해체주의 양식은 건물과 맥락 사이의 단절의 요구하기에 위글리는 “지금까지 맥락주의는 평범성에 대한 변명으로, 친숙한 것에의 멍청한 굴종에 대한 변명으로 사용되었다”는 다소 극단적인 아이젠만이 내세울 법한 칸트주의적 혹은 프리드주의적 주장을 내세운다.
윗글에 대한 데리다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밝힌 적은 없지만, “이것은 파괴, 해체, 쇠퇴, 분해 혹은 붕괴의 건축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파열, 전위, 굴절, 일탈 그리고 왜곡의 건축이다. 그것은 구조를 파괴하는 대신에 구조를 대체한다. … 형태가 먼저인지 혹은 왜곡이 먼저인지, 숙주가 먼저인지 혹은 기생물이 먼저인지 명확하지 않게 된다. … 기생물을 제거하면 숙주를 죽이게 될 것이다. … 그러므로 해체적 건축은 본질적인 딜레마를 건축물 내부에 위치시키는 것이다. ... 형태는 오염되어 있다”라는 점에서 데리다의 존재를 찾아볼 수 있다.
1988년 해체주의 건축전의 거장들은 “내부로부터 왜곡된 불안정한 형태”라는 공유된 관념과 함께 동시대의 양식 없는 다양성의 건축을 향해 나아간다.
질 들뢰즈
들뢰즈주의적 어휘로 작업하는 대다수 저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크윈터의 주요 관심사는 형태가 정적 경지에서 재구성되기보다는 오히려 역동적 견지에서 재구상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크윈터는 정적 접근법은 형태와 객체라는 두 가지 매우 상이한 개념의 “부주의한 융합”이라고 하며 구체적인 현시적 형태를 반대한다. 시몽동은 개별적 존재자들이 완전히 형성된 개체로서 고찰되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의 개체화 과정에 따라 고찰되어야 한다는 점으로, 이것은 몇 가지 측면에서 무정형의 블롭(blob) 같은 아페이론과 같다. 시몽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형상론’이 정적 형태(형상)를 무형의 물질(질료)에 자리하게 함으로써 이미 물질 자체에서 나타나는 준안정한 역동성을 무시한다고 비판했다.
이 모든 것은 최근 철학의 일반적인 반실체적 경향들(생성이 존재보다 선호되고 동사가 완전무결한 반면에 명사와 실체는 영속하는 페널티 박스에 갇혀 있는 경행들)에 완전히 부합된다. 이런 대다수 들뢰즈주의자와 마찬가지로 크윈터의 경우에도 ‘사건’이라는 개념이 특별히 강조된다.
“고전적 구성은 근대적 구상이 형상에 대한 형상의 복잡한 유희를 도입함으로써 교란한 배경위 형상의 명료한 관계들을 유지하고자 했다면, 현재 디지털 기술을 갖춘 우리는 장-대-장 관계의 함의를 받아들여야 한다”
존 라이크먼은 “복잡성을 구성요소들의 어떤 주어진 총체성과 단순성으로” 환원한다는 이유로 벤투리를 비난하고, “깊이를 형상과 배경의 동시성”으로 환원한다는 이유로 콜린 로우를 비난한다. 들뢰즈 주의자들은 객체보다는 장을 옹호하며 당대의 건축 이론이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역사적 맥락주의와 해체주의의 “강력한 맥락 거부” 사이에서 갈피를 못 잡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장을 지지하여 형상을 포기하는 조치는 본질적으로 덜 극단적인 문제에 대한 극단적인 해결책이다.
건축가 그렉 린은 로벤트 벤투리, 피터 아이젠만, 베르나르 추미, 프랭크 게리의 작품을 언급하며 “지난 10년 동안 가장 전형적인 건축은 대립물들의 건축적 재현에 진력한다”라고 한다. 그러나 그는 해체주의에 반론하기보다는 해체주의 속의 연속적인 것에 주의하는 듯한다, 게리 하우스가 생성하는 갈등을 증식하는 대신에 … 덜 대립적이고 더 유연한 논리는 위반의 정도가 아니라 새로운 연결 과계들이 활용될 정도를 규명할 것이다. … 해체주의의 연속적인 것들의 내부에는 뜻밖의 불가피한 응집의 계기들이 존재한다.” 그는 건축이 본질적으로 관계적이라며 칸트의 주장을 긍정적으로 인정하는 듯하며 “그것들에 공동으로 가해지는 어떤 외력에 의해 뒤얽히게 되는 자유로운 강도적인 것들”이라고 건축에 대한 전형적인 들뢰즈주의적인 “분균질 하지만 연속적인” “접힌 혼합물”을 옹호한다.
그는 순수성과 자율성에의 과도한 헌신에서 비롯되는 영화 프레임적인 “안정 상태의 윤리” 반대하며 “실체를 잠재적으로 활성화하고 현실적으로 안정하게 하는 운동과 시간의 범형”을 제시한다. 그는 “다른 영향의 장들에 의해 규정되는 중심, 표면적, 덩치 그리고 조직”을 가지고 있는 블롭과 메타-볼등을 “생동하는 형태”로서 들뢰즈 철학에 대한 자신만의 해석을 제시한다.
들뢰즈의 연속적인 철학은 라이프니츠와 상반된다. OOO는 라이프니츠(아리스토텔레스-아퀴나스-라이프니츠 선상)의 철학에 기반을 두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주의적 제일실체는 전적으로 다른 무언가가 되지 않은 채로 우유적인 것, 성질 그리고 관계의 변화를 겪을 수 있으며, 그리하여 다른 상황에 처하고 다양한 영향을 흡수하고 저지함에 있어서 두드러진 유연성을 객체에 부여한다.
"실체들은 분균질하지만 결코 연속적이지 않다. 건축이 이 교훈을 망각한다면 개구부를 위치시키거나 혹은 파사드와 일련의 방을 분절하기 위한 어떤 원리도 남지 않게 될 것이다. 게다가 건축은 모든 특정한 프로젝트의 이산적이고 한정된 본성에 대한 감각조차도 상실할 것이다. 이렇게 해서 건축은 도시 공간을 그 속에서 소통 역시 방해받고 둔화되는 빽빽하고 떠들썩한 숲으로 해석하기보다는 오히려 소통 체계로 잘못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요약
하이데거와 현상학적 전통은 감각적 경험을 ‘휴머니즘’적인 것으로 일축하려는 다양한 주지주의적 시도에 맞서 그런 경험이 진지하게 고려된다는 것을 확고히 하는 데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건물은 결코 개념이 아니기에 시각적 성질과 촉각적 성질이 어렴풋이 비치는 표면으로 표현됨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단점은 개인에 대한 과도한 집중이다. 게다가 하이데거 철학은 존재를 일자와 동일시하고 존재자를 다자와 동일시함으로써 모든 경험의 깊은 배경이 내부적 복잡성이 없는 하나의 단일체적 덩어리라고 잘못 시사하는 두드러진 경향을 나타낸다. 따라서 피상성의 흔적이 떠나지 않고, 상당히 현상학적인 작품에는 대단한 정도의 공예가 투입됨이 당연하다.
데리다의 해체주의 건축은 종종 정말로 심란하게 만들고, 흔히 맥락의 직서주의적 평범성을 분쇄하는 데 성공한다. 해체주의의 분해 본능은 현상학의 암묵적인 전체론을 회피한다.
단점은 종종 전복적이고 과시적인 장난거리에 혹하는 뒤샹의 단점을 공유한다, <수염 난 모나리자> 같은 작품은 결코 두 번 웃기지 않는다. 이런 추세는 언제나 일회성의 이색적인 기념물에 가장 적합함을 시사한다. 해체주의 도시계획 학파는 절대 출현하지 않을 것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연속적인 파도를 타는데 적합한 들뢰즈주의적 건축은, 그것의 자연적 요소들로 분절하는 방법에 관한 모든 가정을 약화시킨다. 전체가 부분들에 우선하며, 그리고 이런 전도는 심지어 가장 작은 구성요소들에도 매우 견실히 적용된다.
단점은 잠재 영역은 불균질한 동시에 연속적이라는 연속적인 것과 이산적인 것 사이의 갈등으로 건축적으로 분절의 진짜 문제들을 직면할 수 없는 무능력에 반영된다. 모든 가능한 긴장 관계(건축물과 맥락, 구조와 외피, 매스와 장식)는 시작되기도 전에 너무나 쉽게 해소된다.
이 책의 기본 원리들
OOO는 연속적인 흐름의 패러다임에 지쳐버린 건축가들에게 광범위한 호소력을 가지지만, OOO는 객체와 그 자체의 성질들 사이의 종종 에두르는 관계에 관한 이론이다. OOO는 반직서주의적인 이론이다.
2장 | 형언할 수 없는 것
하먼은 ‘형태’를 “자신이 관여하는 모든 관계로부터 떨어져 있는 사물의 실재”로 정의하며 대다수 공리주의적인 기능과 “보는 사람에게 부분적으로 의존하고, 따라서 독자적인 형태의 실재에 속하기보다는 오히려 경험의 감각적 영역에 속하는” 시각적 외관의 형태를 배제한다.
또 그는 ‘기능’은 “사물의 협소하게 실제적인 효과를 가리킬 뿐만 아니라, 순전히 허울뿐인 것처럼 보이든 개념적인 것처럼 보이든 간에 사물이 맺은 관계라면 무엇이든” 가리키는 것으로 정의한다.
그러므로 형태/기능 쌍을 실재/관계 쌍으로 대체한 것이다.
건축의 형태에 대한 구분
형태/기능 관계는 합리론/비합리론의 관계로 이어지기도 한다. 하먼은 여기서 두가지 점을 짚고 넘어간다. (1) 형태와 기능은 두 가지 거대한 기붕이라는 지위에 걸맞지 않게 충분히 구별되지 않는 않는다. 형태와 기능이 둘 다 너무나 관계적인 방식으로 구상되며, 그리고 그것들의 추정상의 차이가, 현존하지 않는데도 현존한다고 소문이 난 지각과 실천 사이의 간극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2) 실재는 합리화될 수 없을 따름이고, 따라서 건축은 모든 고정된 비례적 규칙의 노예일 수도 없고 수학적 규칙의 노예일 수도 없다.
"역사 전체에 걸쳐서 두 가지 구별되는 별개의 추세, 즉 하나는 합리적인 것과 기하학적인 것을 향한 추세 ─ 환경을 다루거나 지배하는 두 가지 상이한 방식 ─ 가 지속한다."
기디온, Space, Time and Architecture
비트루비우스의 경우 대칭은 건축물의 한가지 중대한 측면이며, 인체의 비례 역시 중요한 관련 사항이다. 고전적인 도리스식 오더, 이오니아식 오더 그리고 코린트식 오더는 ‘남성적’ 특질과 ‘여성적’ 특질의 상이한 비율을 수반하며, 그리고 이들 약식은 각각 나름의 고유한 건축적 용도로 쓰인다.
대칭과 비례에 의지한 비트루비우스는 두가지 상반된 측면에서 비판을 받았다. (1) 그는 비례에 관한 논의를 너무 남발한다. 충분히 합리적이지도 수학적이지도 않다. (2) 그는 견고한 비례의 구속복을 창출한다. 너무 합리적이고 수학적이다.
회화와 조각품이 사회에서 어떤 특정한 기능을 담당할지라도 그 기능은 그것들의 실재에 주변부적인 것인 반면에, 건축물은 두드러지게 기능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시각 예술의 작품은 다른 맥락으로 옮겨질 수 있다는 점에서 칸트가 예술 작품에 대하여 탈맥락화된 순수한 아름다움을 요구하는 것이 타당할 수 있지만, 건축의 경우에는 그 기능이 기획설계에서 비롯되기도 하기 때문에 맥락의 요구를 분명히 구현하는 구조물이어야 한다. 그런데 건축물의 형태는 그 건축물의 목적에서 직접 비롯되기 마련이라는 것은 절대 분명하지 않다.
설리반의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형태를 전적으로 기능에 연계함으로써 적어도 설리반은 역사주의적 장식이나 수학적 비례에 대한 임의의 지침 같은 그 밖의 가능한 영향을 배제하게 되기 때문이다. 만약 칸트가 살아있다면 그는 “형태를 오로지 기능에 의거하여 규정함으로써 쾌적한 것, 개념적인 것, 역사적인 것, 한낱 장식에 불과한 것, 그리고 순수한 형태를 오염시킬 수 있는 그 밖의 것들을 물리친다. 요컨대 설리반은 유용성이라는 자체에 내장된 불리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건축을 가능한 만큼 자율적인 것으로 만든다”라며 흡족해할 것이다.
"건축물은 오로지 그것의 정해진 목적과 관련지어 이해되는 듯하다. 대성당의 우뚝 솟은 아치형 지붕은 신의 반쯤 은폐된 현전을 시사한다. 공항은 승객의 편리한 이동과 항공기의 안전한 착륙과 활주를 지원하며, 건축물이 예술품으로 처우받지 못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예술에서의 형식주의는 존재론적 패쇄성의 특별한 일례이다. 하나의 세포의 세포벽 안과 밖이 단절돼있듯, 혹은 문학적 형식주의는 어느 시가 그 전기적 환경으로부터 단절되어야 한다고 하듯이, 자율성을 우리가 그 작품의 문을 통과하는 순간 끝이 난다.
그리하여 합리주의적인 것과 픽처레스크한 것 사이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 객체의 자체 환경으로부터의 어떤 순수한 폐쇄성도 관계가 어떻게 가능한지 그리고 때때로 심지어 바람직한지 설명하지 못한다.
- 자율적인 형태를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 역시 서로로부터 부분적으로 자율적이다. 모든 형태 혹은 객체는 매끈매끈한 하위 성분들의 매끄럽거나 체계적인 그물망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독립적인 요소들의 느슨한 단일체로 이루어져 있다.
형태에 관한 이 두가지 관점 사이의 차이는 ‘형언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형언할 수 없는 것
근대 철학에서 이 어구는 종종 조소의 용어로 사용된다. 경험론 철학에서 로크의 계승자인 조지 버클리는 사물의 뚜렷한 성질들의 아래에 어떤 불가사의한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급진적인 참신한 주장을 할 만큼, 흄의 회의주의와 더불어 명백하지 않고 감춰진 것에 대한 이런 혐오는 서양 철학에서 지속적인 성향이 되었다.
그러나 형언할 수 없는 것에 대한 감각이 없다면 철학은 생존할 수 없다. 실재는 이성으로도 감각으로도 직접 접근할 수 없는 것으로, 이는 오래된 합리론/경험론 논쟁이 핵심을 벗어난 것임을 뜻한다. 현재의 철학에서 ‘실천’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유행하고 있더라도 우리는 일상적인 실천적 행동에서 세계에 직접 접촉하지 않는다.
칸트가 부활시킨 인식 불가능한 ‘물자체’개념은 그의 계승자들에 의해 재빨리 일축되었지만, 미학에서는 살아남았다. 합리적 공식이란 것이 존재하기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예술 작품을 그것의 물리적 구성요소들로 환원하거나 직서적 명제들의 합으로 환원하는 것은 이상할 것이다. 예외적인 것들은 어쩌면 예술가가 의도적으로 그런 환원들을 가지고 장난하는 이례적인 사례들일 것이다. 그러나 뒤샹의 레디메이드가 영리한 직서주의적 묘기라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예술 작품으로서 적용시키려면 감상자가 미적으로 개입하도록 끌어들여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앤디 워홀이 말했듯 “무언가가 예술작품이라고 말하면 그것은 예술 작품”이라는 단순한 조건 이상의 것을 필요로 한다.
하먼은 합리론은 직서주의의 특별히 두드러진 한 아종일 따름이라고 밝힌다. 직서주의는 우리가 어떤 주어진 존재자도 적절한 일단의 성질을 나열함으로써 제대로 서술할 수 있다는 관념이다. 라이프니츠는 직서주의자이다.
실재 자체는 언제나 물러서거나, 혹은 관계 맺기를 자제한다. 그러므로 모든 진정한 실재론은 그 자체로 인식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단지 직서적 수단을 인식 불가능할 따름인 ‘형언할 수 없는 것’을 유지해야한다.
메를로-퐁티는 집이 그것이 모든 가능한 경관의 총합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지만, 하먼은 집의 경관이 많이 있기에 집이 현존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이 하나의 집이기에 그것의 상이한 경관들이 가능한 것이라 한다. 지식과 실재 사이의 ‘형언할 수 없는 것’이라는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유럽인들) 사이에서 건축물과 정원의 아름다움은 주로 어떤 비례, 대칭 혹은 균일성에 놓여있다. 우리의 산책로들과 우리의 나무들은 서로 잘 어울리도록, 그리고 정확한 거리를 두고서 배치된다. 중국인들은 이와 같은 정원 조성 방식을 경멸한다. … 그들의 최대한 넓은 상상력은 형상들을 고안하는데 동원되는데, 이 경우에 그 아름다움은 탁월하고 눈길을 끌지만, 흔히 혹은 쉽사리 관찰될 어떤 부분들의 질서도 배치도 전혀 없다.”
하먼은 티머시 모턴의 ‘초객체’ 개념을 통해 칸트의 ‘숭고한 것’에 대한 결함을 보강하는 것 같다. 숭고한 것이란 인간의 파악 능력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넘어서는 일종의 무한이고, 초객체는 매우 거대한 유한이다.
숭고한 것의 인기를 수상히 여기면서 우리는 오히려 “풍경에 활기를 불어넣으면서 운동하는 물방앗간과 그 밖의 수력 기계들”과 더불에 “작은 숲에 난 꾸불꾸불한 길”에 의해 초래되는 특정한 기묘한 효과에 집중해야 한다.
제로의 힘
하먼은 현대 심리철학의 심적 생활에 대한 일인칭 접근법과 삼인칭 접근법에 대해 서술하면서 “일인칭 서술도 삼인칭 서술도 마음 혹은 여타의 것을 설명하는데 충분하지 않기에 우리는 두 종류의 이미지들의 조합된 힘으로 망라되지 않는, 사물 속 잉여에 파고들 간접적인 영-인칭 접근법이 필요하다”라고 자신의 견해를 밝힌다.
“건축적 형태를 이해하려면 우리는 움직임의 개념을 도입하고 건축의 경험이 수많은 경험의 총합이라고 가정해야 한다. 이들 경험은 각각 시각적으로 (그리고 여타의 감각을 통해서도) 파악되지만 당초에 회화 작품을 파악하는 데 필요한 시간보다 훨씬 더 긴 시간 동안 축척된다”
피터 아이젠만, Eisenman Inside Out
로시의 경우, <도시의 건축>에서 밝혔듯 그에게 기능보다 더 깊은 것은 형태이고, 형태보다 더 깊은 것은 유형이다. “어떤 유형도 단 하나의 형태와 동일시될 수 없다. … 유형은 건축의 바로 그 이념으로, 건축의 본질에 가장 가까운 것이다.” 기능은 근본적일 수가 없다. 왜냐하면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 기능이 바뀌어 버리거나 혹은 어떤 특정한 기능도 현존하지 않는 중요한 도시 인공물들”이 있기 때문이다. “건축물과 형태의 영속성은 아무 의미가 없을 것이다. … 모든 도시 인공물이 어떤 정적인 방식으로 특정한 순간에 그것들이 수행하는 기능에 정확히 부합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관계는 단지 바로 지금 그런 것일 뿐이지만, 객체는 한 시점에 한 역할을 수행하고 그 후 다른 한 시점에 다른 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특정한 도시 인공물을 구성하는 일단의 변환을 통해서 지속하는 것은 바로 형태라는 것 … 맥락이라는 용어에 대하여 우리는 그것이 대체로 연구의 방해물임을 깨닫는다. 맥락에 대립적인 것은 기념물이라는 관념이다.”
그럼에도 로시는 기능은 결코 기념물화될 수 없을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먼은 건축의 명예를 지키는 올바른 방법은 한편으로는 기능을 형태화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기능을 여전히 형태와 구분되는 것으로 유지하는 것이라고 한다. "첫 번째 과업에 실패하는 것은 건축이 미학의 내부 성소로부터 배제된다는 칸트의 주장을 인정함을 뜻한다. 두 번째 과업에 실패하는 것은 건축이 비본질적인 기능에 전적으로 오염되지 않은 또 다른 형태의 시각 예술일 따름이라고 주장함으로써 건축을 '구조하는 것'에 해당한다."
1,2 장에서 그레이엄 하먼은 객체지향존재론과 함께 자율적인 객체로서의 건축을 논해야한다고 밝힌다. 동시에 철학가와 건축가들의 역사적 맥락에 근거하여 ‘제로-형태’, 그리고 ‘제로-기능’적인 건축을 추구해야하는 철학적 사유를 밝힘으로서 후반부에 나올 자신의 담론을 향해 이끌어 간다.
'서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성의 명암과 건축이론」 임기택 (0) | 2024.05.18 |
---|---|
「건축과 객체」 그레이엄 하먼 (下) (0) | 2024.04.02 |
「감시와 처벌」 (1) | 2024.02.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