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의 해부학
권력이라 하면 이 시대에는 없어진지 오래인 역사적인 개념같이 들리지만, 현대의 자본주의 사회는 겉으로만 민주적인 방식을 취하면서, 사실은 규율권력을 통해 신체를 기계처럼 만들고 있다. 이것이 우리가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이다.
규율은 (유용성이라는 경제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신체의 힘을 증가시키고, (복종이라는 정치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동일한 신체의 힘을 감소시킨다.” 푸코는 감옥 속 신체 담론을 근대 사회로 확대한다.
권력에 관한 비가시적이었던 모든 문제들을 수면 위로 끌어올린 미셸 푸코의 권력의 해부학. 권력은 어떻게 길들이는가. 정상과 비정상의 이분법적인 사회를 탈구축하기 위한, 다양성을 지향하는 사회를 위한 첫걸음을 제시한 책.
이 책의 목표는 근대적 개인의 정신과 새로운 사법 권력의 상관적 역사를 밝히는 것이다. 그것은 처벌을 관장하는 권력이 근거를 두고 있고, 정당성과 법칙을 받아들이고, 영향을 넓혀가면서 그 엄청난 기현상을 은폐하고 있는, 과학적이고 사법적인 복합 실체의 계보학이다. 「감시와 처벌」, p52
비가시적인 권력 - 감시
"내 머리 위에 별이 빛나는 하늘과 내 마음속의 도덕 법칙." 칸트는 인간에게 '나는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에 대답하는 '실천이성'이 있다고 한다. 마음속의 별, 개인의 윤리. 이런 실천 이성, 혹은 도덕 법칙에 따라 인간은 공동체를 이루어 문명을 세우고, 사회를 발전시키며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푸코에게는 조금 더 과학적으로 다가왔다. 규율사회에서의 비가시적인 '감시'인 것이다.
질 들뢰즈가 말했듯, 규율이란 "제도나 기구를 연결시키고, 연장시키고, 일치시키면서 그것들이 새로운 방식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모든 제도와 기구를 관통하는 기술이자 권력의 형태"이다. 현대의 규율은 세련되게 발전하여 '감시'라는 이름 뒤에 교묘하게 숨어있다.
권력은 아래에서 나온다는 것, 즉 권력관계들의 원리에는 일반적인 모체로서 지배자들과 피지배자들 사이의 이항적이자 전반적인 대립이 없다. 또한 위에서 아래로, 그리고 사회체의 심층부에 이르기까지 점점 더 제한된 선출된 집단들에 반향을 일으키는 이런 이원성이 없는 것이다. 오히려 생산의 기구들, 가족, 제한된 집단, 제도 속에서 형성되고 작동하는 복수의 힘 관계들이 사회체 전체를 관통하는 단층대의 거대한 효과(거대한 균열의 효과)를 뒷받침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가정해야 한다. 미셸 푸코, <성의 역사 1:지식의 의지>
즉, 권력은 일방적으로 지배자가 피지배자에게 행사하는 것이 아닌 '복수의 힘'의 관계로 이루어진 복잡한 메커니즘인 것이다. 현대에는 이 메커니즘이 상호 체계적이고 너무나도 복잡한 나머지 피지배자조차 지배받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지배자조차 자신이 누군가를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전 지구적인 규율사회 속의 모든 객체가 자신이 그토록 무서운 규율 체제의 일원이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다.
형벌의 역사와 감옥
과거 군주제의 사법적 신체형은 또한 정치적인 행사로 이해되어야 한다. 아무리 규모가 작은 형태일지라도, 그것은 권력이 자신의 모습을 과시하는 행사의 일부이다. 징벌은 특히 다른 사람들을, 즉 죄인이 될 가능성이 있는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삼는다. 수형자의 신체는 과거의 제도에서는 국왕의 것이어서, 군주는 그 신체에 낙인을 찍고 권력의 여러가지 효과를 집행할 수 있었다. 징벌의 일차적인 목적은 시민들에게 군주의 권력을 과시하고 공포를 심어주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항해술의 발전 등과 같은 이유로 상업적 교류가 활성화되고 자본의 축적이 늘어나며 빈부격차 등이 불씨가 되어 시민들의 불만은 군주에게로 향하게 된다.
스펙터클은 더 이상 징벌의 효력을 잃고, 공개적인 체벌은 가난한 시민들의 분노를 일으켜, 군주제는 파멸하게 된다. 그 이후의 시대는 <사회계약론>의 개념과 함께 개인의 신체는 군주의 것이 아닌 오히려 사회적인 것으로서, 집단적이면서 유익한 소유의 대상이 된 것이다. 그리하여 범죄자는 직접적인 물리형 대신에, 대중이 보는 곳에 사회에 유익한 노동을 하거나 재산과 자유를 몰수 당하는 등의 정신적 처벌을 받는다. 처벌의 대상이 육체에서 정신으로 변환되었으나, 아직까지 형벌이 가해지는 지점이자 형벌이 사회에 영행을 미치는 수단은 표상이다. 일종의 광고 효과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신체형이 사라지고 구금형이 보편화되면서 거의 모든 가능한 처벌을 구금형이 대체하게 되었다. 즉 "조국을 배반했을 경우에도 감금되고, 아버지를 살해했을 경우에도 감금되는 것이다. 상상할 수 있는 일체의 범죄는 완전히 획일적인 방식으로 처벌된다. 마치 어떤 병일지라도 똑같이 치료하는 의사를 보는 것 같다". 일종의 사회계약인 형법이 정당성을 가지고 모든 사회 일원이 동의를 하려면, 처벌의 투명성과 합당성이 보장되어야 한다. 시간이 흘러 감옥은 '교정시설'이라는 이름과 함께 이 위기를 극복한다. 처벌의 대상이 표상에서 개인으로 변한 것이다. 죄를 사회에 봉사함으로써 갚는다기 보다, 죄인 한 사람 한 사람을 교정시키도록 하는 것이다. 이와 함께 처벌하는 권력의 제도화가 이루어졌다.
따라서, 문제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즉, 어떻게 하여 세 번째의 감옥 제도가 결국 주도적인 것으로 부각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강제권, 신체, 고립, 비밀을 중심으로 한 처벌 권력의 모델이 어떻게 하여 표상, 무대, 기호, 공개, 집단을 중심으로 한 모델을 대신하게 되었는가? 왜 처벌의 물리적인 행사가, 그것의 제도적인 토대가 되는 감옥과 함께 징벌의 기호들과 이 기호들을 널리 유포시킨 떠들썩한 축제 분위기의 사회적 유희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는가?
<감시와 처벌>, p209
이 문제는 모두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책에서 직접적으로 밝히진 않았지만 책의 후반부에서 푸코는 이렇게 답하는 듯하다.
고대는 스펙터클의 문명이었다. "다수의 인간으로 하여금 소수의 대상을 관찰할 수 있게 한다." 바로 이러한 문제와 짝을 이룬 형태가 성당, 극장, 원형 경기장의 건축이었다. 스펙터클과 함께 공적인 생활, 성대한 축제, 관능적 쾌락이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피를 볼 수 있는 이러한 관례적 행사를 통해 사회는 활력을 되찾고, 잠시 동안이라도 거대한 일체감을 이룰 수 있었다.
근대는 정반대의 문제를 제기한다. 즉, "극소수가 혹은 단 한 사람이 대다수 집단의 모습을 한 순간의 시선으로 모두 볼 수 있게 한다." 공동체라든가 공적 생활이 주요한 요소가 되지 않고, 한편으로는 사적인 개인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가 주요한 요소로 되어 있는 사회에서 모든 관계들은 스펙터클의 성대함과는 정반대의 형태로만 조정될 수 있다.
"대다수의 군중들을 동시에 감시하기 위한 건물의 건설과 배치를 지휘하고 활용하면서 사회생활을 발전시키고
또한 안전하게 만들 수 있게 된 것은, 국가의 영향력이 증대하고, 국가가 사회생활의 모든 관계와 일상의 세부적 문제에 더욱 깊이 관여하게 된 현대에 이르러서이다." ... 현대 사회는 스펙터클의 사회가 아니라 감시의 사회이다.
일상화된 감시와 상호 교차적인 시선의 철저한 경계로 바뀌게 되어 마침내 태양도 독수리도 쓸모없게 만드는 판옵티콘 감시체제 속에 사그라져 버린 긴 역사과정이다. <감시와 처벌>, p333-334
규율의 목적은 본래 사회의 구조가 생겨남에 따라 법을 형법을 통해 사회를 혼란스럽게 하는 방랑자를 퇴치하거나 사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여 경제적 이득을 취하기 위함이었는데, 18세기에 유랑민들의 증가, 통제나 조작이 중요시되는 집단들의 양적 규모의 변화(취학 인구나 입원 환자 등)로 인해, 점점 더 다양해지고 복잡해지고 비용 또한 더욱 많이 들어 그 수익성을 높일 필요가 생기게 된 생산 기구가 증대한 것이다.
이를 위해 규율이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제시되었다:
규율은 대중 집단 현상에 수반되는 '비효용성'을 감소시킨다.
규율은 조직된 집단 다수의 구성으로부터 형성되는 모든 힘을 통제해야 한다.
규율은 집단 가수를 효용증대의 수단으로 이용해야 하는 것이다.
규율은 권력의 여러 관계들을 가동시키는 데 있어서 집단 다수의 위에서 군림하듯이 하지 않고 다수의 조직 안에 있으며, 또한 그 방식은 가능한 한 가장 신중하면서, 다른 여러 기능과 가장 밀접하게 연관을 맺고, 가장 비용이 적게 드는 것이어야 한다.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스펙터클과 표상적인 처벌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 것이다.
18세기에 표상과 기호들에 관한 '관념론적' 기술을 통해 탐구되던 대부분의 처벌 기능은 이제 여러 가지 감옥 장치들의 확장, 복잡하게 흩어져 있지만 일관성 있는 물질적 골격으로 유지된다. 그 결과로서, 가장 사소한 부정행위와 최악의 범죄 사이에는 어떤 공통된 의미가 순환하고 있다. 이제 그것은 더 이상 과오도 아니고, 공동의 이해관계에 대한 침해도 아닌, 일탈과 비정상이다. 학교, 재판소, 수용소, 또는 감옥에 늘 붙어서 떠나지 않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 감옥 체계는 전술의 측면에서 일반화하는 기능을 의미의 측면에서 일반화한다. 군주의 적대자가 사회의 적이 되었고, 사회의 적은 무질서, 범죄, 광기라는 여러 가지 위험한 요소를 갖고 있는 탈선자로 바뀌었다. 감옥의 네트워크는 처벌의 대상인 것과 비정상인 것이라는 길고 다양한 두 계열을 복잡한 관계에 따라 연결 짓는다.<감시와 처벌>, p454
형벌제도의 진짜 목적은 범죄를 근절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범죄를 차이에 따라 나누어 관리하고 시민을 다스리기 위한 장치로 만들어진 것을 이해해야 한다.
그리하여 감옥은 사회에서의 정상과 비정상인의 이항대립과 함께 탄생한 것이다.
17세기 중반 무렵에 감옥이라는 시스템이 생겨나고 범죄자 격리가 시작되는데, 그 시기에 광기(비정상)의 격리도 일어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 감옥 혹은 감옥적인 공간(병원 등의 시설)에 노이즈를 집약함으로써 주류파 세계를 깨끗하게 해 나가게 되었습니다. 이런 청정화야말로 바로 근대화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근대화에는 어떤 의미에서 격리보다 중요한 측면이 있습니다. 예전 시대에는 격리되어 있던 사람들을 점점 '치료'하고 사회 속으로 되돌리는 움직임이 나옵니다. 하지만 그것이 사람에게 살가운 세상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푸코적 관점에서 보면 통치가 더 교묘해졌다고 봐야 합니다. 즉, 단지 배제해 두기만 할 뿐이라면 비용이 많이 들지만, 그러한 사람들을 주류파의 가치관으로 세뇌하여 다소 도움이 되는 인간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면, 통치하는 쪽에서 보면 더 편리한 것일 테니까요. 지바 마사야, <현대 사상 입문>
18세기에는 범죄자가 실제로 범죄를 저질렀는가 하는 사실 여부가 중요기된 반면에, 19세기에는 범죄자의 범죄 행위보다 그의 삶과 개인적 경험이 판결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고가 되는 사례를 발견한다. 이는 과학과 정신의학의 발전이 극단적인 비정상과 정상의 이항대립을 조금이나마 완화시켰음을 보여주는 바람직한 사례이다.
그러나 마냥 긍정적으로 볼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근대화 이전의 군주제 시대, 즉 신체형의 시대에는 왕권을 과시하기 위해 스펙터클한 처벌을 실시했고, 이는 왕권의 대서사에 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의 일탈은 수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군주제의 몰락과 함께, 권력은 점점 교묘하게 발전해 나갔다. 17세기에 들어서 권력은 사람들의 힘을 감소시키기 위한 것이 아닌, 그 힘들을 증가시키고 활용할 수 있도록 묶어 두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더 이상의 과시적인 권력은 없고, 조심스럽고 의심스러운 영구적인 관리 방식이 생겨난 것이다. 이러한 규율의 훈련은 시선의 작용에 의한 강제성의 구조를 전제로 한다.
어리석은 전제 군주는 노예들을 쇠사슬로 구속할지 모르지만, 참된 정치가는 그것보다는 훨씬 더 강하게 관념의 사슬로 노예들을 구속한다. ... 가장 튼튼한 제국의 흔들리지 않는 기반은 인간의 부드러운 두뇌 신경조직 위에 세워진 것이다. (p167)
고전주의 시대가 진행되는 동안 서서히 집단 대중에 대한 '감시시설'이 건설되는 것을 알 수 있는데, ... 한편에서는 새로운 물리학 및 우주론의 정립과 더불어 망원경이나 렌즈, 광선속등 중요한 기술이 개발되어 온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다양하고 상호 교차적인 감시의 기술, 또한 보이지 않으면서 보아야 하는 시선의 작은 기술들이 자리 잡게 되었다.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빛과 가시적인 것에 관한 과학 기술은 인간을 복종시키기 위한 방법과 인간을 이용하기 위한 수단을 통해서 암암리에 인간에 관한 새로운 지식을 준비하게 되었던 것이다.(p269)
과거의 화려하고 과시적인, 권력 대신에 이제 고유한 메커니즘으로 유지되고 계산된 시선이 끊임없이 작동하는 인간관계의 권력이 들어서게 되었는데, 이 권력을 가동시키는 것이 바로 규율이다. 감시의 여려 기술에 의해서 권력의 '물리학'과 신체에 대한 지배는 적어도 원칙적으로는 과격한 행위, 힘이나 폭력에 의존하지 않고, 광학과 역학의 모든 법칙, 그리고 공간, 선, 막, 다발, 비율 등의 모든 작용에 의거하여 이루어진다. 그것은 한층 더 교묘하게 '물리적'으로 될수록 표면적으로는 한층 덜 '신체적'으로 되는 그러한 권력이다.(p280)
우리는 개인들이 구성요소로 되어있는 현대 사회의 모델은 계약과 교환이라는 추상적인 법률 형식에 의거해 있다고 생각한다. 상업적인 사회란 개별적인 법적 주체의 계약에 의한 결합으로 표현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사회계약론"적인 사회가 가능하려면 규율에 의한 개인화가, 즉 개인을 권력과 지식의 상관적 구성요소로서 만들기 위한 훈육기술들이 전제했어야 한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 '정상'을 기준으로 삼는 비교의 척도에 의해서, 공적보다는 '일탈'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규율의 체제 안에선, 어린이가 어른보다 더 개인화하고, 환자가 건강한 사람보다 먼저 개인화하며, 광인과 범죄자가 보통 사람이나 범죄자가 아닌 사람보다 더 개인화한다. 여하간 우리의 문명 안에서는 개인화의 모든 메커니즘이 어린아이, 광인, 환자, 범죄자 등을 중심으로 가동되고 있다. 또한 건강하고 정상적이며 법을 준수하는 어른을 개인화하고자 할 때는, 그 이후부터 줄곧 이렇게 질문하는 방식이 가능해진다. 당신은 아직도 어린아이 같은 점이 남아 있는가? 남들이 모르는 광기가 있는가? 어떤 중요한 범죄를 저지르고 싶었는가? 등이 그것이다. 분석적 학문이건 실천적 학문이건 간에 '정신, 영혼(psycho)'이라는 어간으로 이루어진 모든 학문은 이러한 개인화의 역사적 격번 과정 속에 자리 잡고 있다.
<감시와 처벌>, p301
규율사회에서 처벌의 대상이 되는 것은, 모든 일탈행위이다. 모든 '기준 미달'의 인간, 시험에 낙제한 학생, 피부색이 다른 사람, 성소수자. 우리의 사회에서는 '정상인'이 되지 못할 때마다 '죄'를 범하는 것이다. 불량품이 폐기 처분을 받듯이 말이다.
현대에는 다양성을 추구하는 사회로 변화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수 세기에 걸쳐 발전된 '정상인'을 추구하는 규율에 맞서 싸울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이 책에는 중세에 순종적인 신체를 만들기 위해 개발하고 사용된 일련의 효율적인 훈육방식들과 그 역사적 과정이 기술되어 있다.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려는 욕구가 얼마나 대단한지 실로 경악스러울 정도이다.
판옵티콘 체제
18세기에 들어 규율 훈련discipline을 통해 감시를 받지 않아도 스스로 자신을 자기 감시하는, 즉 지배자가 비가시화되는 권력 구조가 탄생했다. 푸코는 '판옵티콘'이라는 이상적인 건축 구조를 예로 들며 이를 설명한다.
각자는 자신의 마땅한 자리에서, 독방에 갇혀 있는데, 그곳에서는 감시자에게 정면에서 보이지만 독방의 측면 벽은 동료들과 접촉하는 것을 가로막는다. 그는 보이지만, 보지 않는다. 그는 정보의 대상이지 의사소통의 주체가 결코 아니다. 중앙의 탑과 마주 보는 그의 방 배치는 그에게 중심축에서의 가시성을 부과한다. 그러나 원형 건물의 분할인 잘 분리된 이 독방들은 측면에서의 비가시성을 내포한다. 그리고 이 비가시성은 질서를 보장한다. ... 군중, 밀집한 대중, 복수의 교환 장소, 집단적 효과인 서로 결합되는 개인들은 폐지되고 그 대신 분리된 개인들의 모임collection이 들어선다. 간수의 관점에서 보면, 이런 군중 등은 셀 수 있고 관리, 통제할 수 있는 다양체로 대체된다. 또 수감자의 관점에서 보면, 격리되고 주시되는 고립 상태로 대체된다.
"이는 일반화가 가능한 하나의 모델이다." 즉, 실제로 판옵티콘에 갇혀있지 않더라도, 유사한 구조적 경험을 한다면 감시는 내면화된다는 것이다. 근대의 학교, 군대, 병원, 가족 등 거의 모든 '미니 국가'는 이런 판옵티콘적 구조를 이루고 있다. 심지어 오늘날에는 인터넷의 출현으로 인해 이러한 판옵티콘적 감시 체계가 더욱 견고해졌다. 이제는 모두가 모두의 감시자이며, 개인이 개인의 감시자인 것이다. 이것으로 근대적 개인이 성립하게 된 것이다.
과학과 규율
서구의 경제적 발전이 자본의 축적을 가능케 한 여러 가지 방법과 더불어 시작된 것이라면, 인간의 축적을 관리하는 방법은 정치적 발전을 가능하게 했다고 말할 수 있는데, 정치적 발전이란 전통적이고, 관례적이고, 비용이 많이 들고 폭력적인 권력 형태가 효력을 상실해 버림으로써, 모든 교묘하고 계획적인 예속화의 기술 체계로 대체된 것을 의미한다.
...규율은, 신체의 힘을 가장 값싼 비용의 '정치적' 힘으로 만들면서, 또한 그것을 유용한 힘으로서 극대화시키는 단일화의 기술 방식이다. 자본주의 경제의 확장은 규율권력이라는 특유한 양식을 초래했다.
...인간의 자유를 발견한 '계몽주의 시대'는 또한 규율을 발명한 시대였다. <감시와 처벌>, p338-342
푸코는 인간에 관한 모든 과학(화학, 생물학, 심리학, 뇌과학, 정신의학 등)은 규율 훈련과 생명정치의 발전이라는 동기 아래 발전했다고 말한다. 즉, 인간이 인간을 더욱 쉽게 통제하기 위해 인간에 관한 과학이 발전시켰다는 것이다.
이에 더불어 모든 자연과학이 인간을 다스리기 위해 발명되었던 조사, 시험, 재판의 수단을 통해 발전되었다는 소름 돋는 주장을 펼친다.
병원부터 학교, 공장 순서로 이 기관들은 단순히 규율에 의한 '질서 확립'에 멈추지 않았다. 그 기관들은 규율 덕분으로, 객관화의 모든 메커니즘이 예속화의 도구와 다름없는 장치들로 되게 했고, 모든 권력의 발전은 가능한 한 모든 지식을 만들어 낼 수 있게 되었다. 규율의 요소 안에서 임상의학, 정신의학, 아동심리학, 교육심리학, 노동의 합리화 등이 형성될 수 있었던 것은 기술 체계에 내재해 있는 이러한 관계를 그 출발점으로 해서였다. 따라서 권력관계의 세련화를 통한 인식론의 해방, 새로운 지식의 형성과 축적을 통한 권력 효과의 다양화라는 이중적 과정이 있게 된다.(342)
실제로 증거 조사는 경험적인 과학들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초보적일지 모르지만, 본질적인 요소였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중세 말기에 급속히 해제된 실험적 지식의 법률적-정치적 모태였다. 그리스의 수학이 측량 기술로부터 생겨났다고 하는 것은 아마 사실일지 모른다. 여하간 자연과학은 부분적으로 중세 말기에 이 증거 조사의 실무작업으로부터 생겨났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대상으로 삼아서, '사실'을 확인하고 기술하고 규정하는 무한한 담론의 질서 속에 사물들을 옮겨 놓는 거창한 경험적 인식은, 아마 그 조작적 모델을 '종교 제판'에서 이끌어 온 것으로 보인다. ... 세속적인 증거 조사와 자연과학과의 관계는, 규율에 따른 분석과 인문과학의 관계와 같은 것이다.
인간에 관한 권력의 탄생? 아마도 그것은 신체와 동작, 행동에 대한 근대적인 강제권의 작용이 이루어진 별로 영광스럽지 않은 고문서 보관소 안에서 그 해답을 찾아야 할 것이다.(298)
사람들이 말하고 있는 그 인간, 그리고 사람들이 해방시키도록 노력하고 있는 그 인간의 모습이야말로 이미 그 자체에서 그 인간보다도 훨씬 깊은 곳에서 행해지는 복종화의 성과인 것이다. 한 영혼이 인간 속에 들어가 살면서 인간을 생존하게 만드는 것이고, 그것은 권력이 신체에 대해 행사하는 지배력 안의 한 부품인 것이다. 영혼은 정치적 해부술의 성과이자 도구이며, 또한 신체의 감옥이다.(62)
현대사회의 감시와 처벌
"우리는 하나의 톱니바퀴와 같은 존재로서, 우리들 스스로 이끌어 가는 권력의 효과들에 의해 포위된 채 판옵티콘 감시구조의 사회 속에 살고 있다."
유념해야 할 것은 이 규율권력이 자본주의의 발전과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판옵티콘 체제를 통해서 도덕성이 발전하고 산업이 활성화된다면, 권력자들은 이러한 기계를 이용하려 들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권력 체제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이제는 불가능에 가깝다. 현대사회의 권력은 생산양식으로 구별되기보다 정보 양식으로 분류되기 때문이다. 오늘날 인터넷의 일반화와 함께 개인의 모든 행동은 기록되고 정보화된다. 인스타, 뉴스, 유튜브 등을 통해 개인에 대한 관찰과 감시는 일상화되었다. 서로가 서로의 감시자이자 피감시자인 것이다.
<감시와 처벌>의 역자 오생근의 서문 마지막 단락과 함께 이 글을 마무리하겠다.
사람들은 정보화 산업의 발전으로 판옵티콘의 기계와 장치가 유형, 무형으로 끊임없이 확산되는 위기의 현실을 위기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위기의 현실임에도 불구하고, 위기로 느끼지 못하는 불감증이 계속 심화되는 것이다. 인간은 판옵티콘의 체제 속에 살고 있는 한, 권력에 예속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현대사회에서 주체적이고 자유로운 삶은 불가능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푸코는 인간이 권역의 판옵티콘 체제 속에 살면서도, 개인의 저항적이고 주체적인 자유로운 삶은 과연 불가능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푸코는 인간이 권력의 판옵티콘 체제 속에 살면서도, 개인의 저항적이고 주체적인 자유로운 삶의 방식은 어디에서든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 책을 덮으면서 우리는 지금, 이곳에서, 자유롭고 주체적인 삶은 무엇인지를 그리고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지를 계속 새롭게 질문해야 할 것이다.
오생근, <감시와 처벌> 역자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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