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architectural option was determined by the notable influence of the built up and landscape surroundings. Thus, in order to preserve the visual relationships and control the complex correspondences between the existing architectural objects, it was decided to divide the terrain into three belts on an east-west orientation. The first partition, defined as a garden, is inscribed in the continuity of the upper allotment section and extends to the pedestrian entrance. The wish to preserve an unconstructed belt at the end of the site permits the establishment of the idea of a cross in the void, and the value the new neighborhood relationships. The lengthwise building constitutes the second belt while the third, asphalted, provides access to the garage. The main volume of the building is arranged along the axis of the allotment, grouping the bedrooms on the upper floor in two perpendicular volumes to the main body. The roofs offer a panoramic view of Paris.”
-OMA/Rem Koolhaas, 1987-1993
건축의 범주를 벗어난 건축물.
입구를 지나치면 마주치는 것은 땅에서부터 솟아 나온 기울어진 기둥들이다. 심란하게 기울어져 있는 회색의 얇은 기둥들은 위로 솟아 컨테이너 박스를 관통하는 듯이 보인다. 언뜻 보면 빌라 사보아의 기둥을 닮은 것 같기도, 혹은 배경의 조경과 어우러져 얇은 나무들로 이루어진 어두운 숲 같기도 하다. 초라하고 궤변적인 통로와 함께 올가미를 연상시키는 이 정경이, 불안을 자아낸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건축의 외형부터 인테리어까지, 수많은 상자와 물체들이 충돌하고 교차한다. 공격적이면서도 겁먹은 듯한 형상을 지어낸다. 사용자로 하여금 가만히 머무르지 못하게 한다. 중력을 거스르는 듯한 좁은 대지 위로 쏫아난 매스들은 역동적인 움직임과 함께 불편함을 자아낸다. 이곳에서 안전한 곳은 컨테이너 상자 속 밖에 없다고 말하는 것 같다.
루프탑의 탁트인 수영장 또 다른 불안의 환영을 만들어 낸다. 난간의 부재와 함께 가려줄 것 하나 없는 옥상에 몸을 뉘우치는 것은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의미한다. 이 집을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사람 없는 주택. 과연 건축이라 할 수 있는가.
그럼에도 이 건축은 역사적이다. 건축인지의 여부는 불확실하지만, 예술로서의 역할은 독창적이다. 건축계에 새로운 메니페스토를 선언하는 듯하다. 우리 시대에 대한 격렬하고 열정적인 외침처럼 들린다. 아무리 공허하고 의미 없는 말처럼 비어 있을지 언정, 여전히 즐길 수 있다고 말한다. 그 공간 프로그램적으로 상자 속의 공허한 삶이며, 인간의 벙어리 행진이며, 아무런 소통이 없는 생기 없는 공간이다. 그럼에도 거장 렘 쿨하스는 불안을 자아내는 건축적 수법으로 역동성과 건축자체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마치 건축이 소통의 주체가 된 듯하다. 벽도 창도 없고, 위도 아래도 없으며, 안도 밖도 없다. 아무런 객체도 그 어떤 표현을 하지 않고, 그 어떠한 부연설명도 불가하지만, 곧 그것이 무엇이든 될 수 있음을 의미함을 발견할 때, 우리는 여전히 욕망하는 것이 남아 있을 깨닫는다. 건축물을 만들고, 그에 대해 논쟁하는 것처럼.
그럼에도 꼭 상기해야할 사실은, 이 모든 것은 클라이언트의 단순한 주택을 넘어선, 역사에 길이 남을 건축 작품을 원한다는 요청이 전제했기에 가능했던 혁신적인 메니페스토라는 것이다.
불쾌, 혹은 '섬뜩함'을 일으키는 하이데거적 해체주의 수법은 사실 현대 건축에서 많이 쓰이는 수법이다. 그러나 주로 미술관, 메모리얼(기념관) 등의 기념비적인 기능과 함께 쓰인다. 이런 기법을 주택에 접목시켰다는 점에서 불안을 일으키는 예술 작품 속에서 살아가는 그들은 과연 만족할지, 이러한 범형이 일반화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But is this house – which could in no way serve as a model - still architecture?
once past the gate, the eye balks at the piles out of plumb, painted in differeing grays to create a trompe l'aeil depth. With the pathetic little concrete path running over the lawn and weaving thru them. So the snare is set from the start: the house is not what it appears to be, and systematically adopts – sometimes with humor, sometimes aggressively – the contrary position to what it recalls, to what we expect, or to what we imagine. In this way the ground floor is nothing of the sort.
There is no pause, however. No static position really possible. To escape from this discomfort, you have to take refuge inside the boxes, where intimacy seems to be reserved. The play on the roof offers another illusion. The gift of the sky is factitious. Resting one's body there would mean exhibiting one's self, and, since there is no parapet, it wouldn't do to be subject to vertigo. Not for you and me then.
No more perhaps than the villa itself, since nothing proves that it is a house, so thoroughly has the idea of home been evacuated This manifesto of the new age is thrown like a fierce and exultant cry in the face of our times. It says that its values are empty, like words without meaning, but which we still play. That there is no living, other than the hollow of a box. No communication other than deambulation, or the dumb parade of bodies. Just as there are no walls, no windows, no below or above, no inside, no outside. When nothing says, when nothing more is said, when anything can be done, there still remains what we desire. Making architecture for instance, and talking about it.
아래 문헌을 편집, 각색하여 작성한 글.
https://public.websites.umich.edu/~norge/ARCH211/1_2_norge.pdf
'건축' 카테고리의 다른 글
The Mat Building | 대지와 건축 사이의 갈등에 대한 동시대적 해결방법 "Living In Earth" (0) | 2024.02.29 |
---|---|
Form follows Function | 장식의 대가 루이스 설리반은 어쩌다가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를 외치게 되었을까. (1) | 2024.02.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