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체주의 건축의 기반을 제시한 '부러진 도구의 철학자' 하이데거, 그는 현존재가 자신의 존재 자체에 대한 물음을 통해서만 존재의 의미를 탐구할 수 있다는 존재물음의 필연성을 제시한다.
“물음은 어떤 것에 대한 물음으로서 자신에게서 “물어지고 있는 것”을 가지고 있다. 모든 어떤 것에 대한 물음은 어떤 방식으로 건 어떤 것에 물음을 거는 것이다. 물음에는 물어지고 있는 것 외에 “물음이 걸려 있는 것”이 속한다. 탐구하는, 다시 말해서 이론적인 물음에서는 물어지고 있는 것이 규정되고 개념화되어야 한다. 이 경우, 물어지고 있는 것에는 본래 의도되고 있는 것으로서 물음이 꾀하고 있는 것이 놓여 있다. 물음은 여기에서 목표에 이르게 된다.”
배우는 자의 입장에서 사악하게 밖에 안 보이는 그의 현상학을 꼭 알아야 하는 이유는, 건축을 포함한 근현대 예술에 끼친 그의 영향이 막대하기 때문이다.
기존의 존재론의 모든 선입견을 뒤엎으며 근대철학에 새로운 지평을 제시한 하이데거는 존재론의 취급방식으로서 현상학을 택한다.
하이데거의 현상학은 우리는 어느 주어진 순간에 자신이 대면하고 있는 객체의 표면을 볼 따름이며, 그리고 그저 나머지 부분 역시 존재해야 한다고 가정한다. “하이데거가 보기에 대체로 우리는 세계의 사물들을 인식하지 못한 채로 그것들에 조용히 의존하며, 그것들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거나 방해물이 되는 경우에만 그것들을 인식하게 된다”는 것이 「존재와 시간」의 논점이다.
하이데거는 예술을, 존재자의 진리가 작품 속에 스스로를 정립시키는 것으로 정의한다.
존재자의 진리를 아는(밝히는) 행위고, 다른 하나는 그런 앎의 행위는 예술가에 의해 제작된 예술작품에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하이데거에게서 ‘진리’는 정립의 주체이다. 예술은 존재의 진리가 생기하는 사건이다. 더구나 존재의 진리는 작품이 되고자 하는 경향성을 갖는다. 따라서 존재의 진리가 자신을 작품에게로 정립하는 방식으로 예술은 현성한다. 하이데거가 예술의 본질을 “진리가-자신을-작품에게로-정립함”으로 규정할 때, 여기에서 언급된 ‘본질’은 현성함을 의미한다.
그런데 예술은 인간 예술가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예술가가 진리의 다가옴에 응답할 때, 진리는 비로소 진리로서 생기한다. 예술가의 도움을 빌어 진리는 비로소 진리로서 생기한다. 즉 예술가의 도움을 빌어 진리는 비로소 작품에게로 정립된다. 진리는 작품이 되고자 하는 경향성을 지니므로 진리는 예술가에게 자신을 작품에로 정립하라고 말 걸어온다. 따라서 예술가의 응답을 충족하기 위한 마주 던짐은 이중적 의미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우선 예술가는 자신을 진리에로 마주 던져야 하고, 또한 동시에 그렇게 포착된 진리를 작품에로 마주 던져야 한다. 즉 예술가는 진리를 선線에로, 면面에로, 그리고 형태에로 마주 던져야 한다.
“예술의 본질은 시 짓기이다.” 시 짓기는 진리를 포착하여 작품에로 마주 던짐이다. 따라서 시 짓기의 본질(즉 무엇-존재)은 진리를 건립함(Stiften)이다.
예술은 진리를-작품에게로-정립함이다. 그런데 이러한 정립함도 일종의 방향성을 갖는다. 진리의 말 걸어옴에 응답하여 작품을 창작하는 이도 인간이고, 또 작품을 살뜰하게 보존하는 이도 인간이다. 따라서 예술이 진리를 건립함은, 진리의 말 걸어옴에 응답해서 인간이 인간에게 일종의 선물을 선사함이 된다.
물론 여기서의 선물은 존재의 진리다. 존재의 진리는 예사로운 선물일 수 없다. 존재의 진리는 우리에게 새로 밝아오는 세계를 의미한다. 이러한 세계는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세계로서 우리에게 익숙한 기존의 세계를 부딪쳐 무너뜨린다(umstoßen). 또한 이러한 세계는 기존의 무엇에 의해서도 대체 불가능한 세계가 된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존재의 진리를 ‘평온하지-않은 것(섬뜩한 것, das Un-geheuere)’으로 규정하고, ‘이러한 진리를 정립함(즉 건립함)’을 ‘부딪혀 엶(aufstoßen)에 비유한다. 또한 그러한 선사함은, 보다 극적으로, 흘러 넘 침(Überfluß)에 비유되기도 한다.
“진리를-작품-에게로-정립함은 평온하지-않은 것(섬뜩한 것)을 부딪쳐 열고, 동시에 평온한 것, 혹은 사람들이 평온한 것이라 여기는 것을 부딪쳐 무너뜨린다. 작품에서 자신을 생생하게 여는 진리는 종래의 것에 의해 결코 증거 될 수도 없고 연역될 수도 없다. 종래의 것의 배타적 현실성은 작품에 의해 반박된다. 따라서 예술이 건립하는 것은 마음대로 처리 가능한 눈앞의 것에 의해 결코 보충되거나 상쇄될 수 없다. 건립은 넘쳐흐름(Überfluß), 즉 선사다.”
하이데거에게는 도구의 '사용'의 맥락 안에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과 같이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있음"의 맥락이라는 것이 있다.
하이데거에게 예술을 포함한 모든 존재자는 하늘로부터 뚝 떨어져서 홀로 공중을 떠다니고 있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대지에 뿌리를 박고 다른 사람들과 상호 작용해 오며 성장한 것이다. 즉, 독립적인 것처럼 보이는 나란 존재 안에 심층 차원에 현존재가 존재하고 지각하기 이전에 다른 사람들의 존재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밭을 보고 이 밭은 누군가에 의해 경작된 밭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심층 차원에서 막연하게나마 밭을 경작한 다른 존재를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이렇듯 모두이지만 아무도 아니기도 한 그 누군가가 내 안에서 나를 지배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는 기본적으로 그들과의 불균형을 줄여나가고 그들에 맞춰서 평균화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이 존재의 부담을 면제해준다고 한다. 우리 자신은 그 평균이 제공하는 편안함 사이에서 만족하게 된다. 그렇기에 자신의 존재란 근본적인 부담이고 ‘불안’은 내 안에 존재하는 타인들 속에서 본래의 나 자신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계기인 것이다.
하이데거는 우리가 어둠 속에서 섬뜩함을 느끼는 이유가 아무것도 보이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이 세계 안에 있는 내 자신의 존재가 더 절실히 드러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기에 불안을 유발하는 현대 미술의 여러 기법이나, 아이젠만이 기둥을 의도적으로 잘못된 장소에 배치하는 등의 건축 수법들은 예술을 통해 본연의 존재를 상기시켜 주려는 하나의 방법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이데거에게 존재의 진리란 섬뜩함이고 따라서 아이젠만의 홀로코스트 메모리얼이 선사하는 섬뜩함은 데리다주의적인 산책이라기보다는 하이데거주의적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건축을 통해 섬뜩함을 촉발함으로써 존재의 생기를 상기시키는 것이다. 리베스킨트의 유대인 박물관 역시 데리다주의적인 해체주의 건축으로 많이 언급되는데, 본인은 하이데거에게서 더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언명한 적이 있다.
그 이외에 많은 해체주의 건축의 '섬뜩한' 요소들은 하이데거의 이런 존재론적 '불안'으로부터 촉발된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어둡게 걸린 하늘을 거대한 번개가 두 조각으로 가르는 것만 같았다. 고통스러움마저 느끼게 하는 그 광휘가 세상의 사물들을 밝음에 드러내 주었다. 문제는 어떤 '체계'가 아니라 실존이었다... 강의실을 나설 때 나는 할 말을 잃은 상태였다. 마치 한순간 세계의 근거를 엿본 것만 같았다."
- 뤼디거 자프란스키, 『하이데거, 독일의 철학 거장과 그의 시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