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존재 이유를 설명하려면 이제는 철학이 필요하다.
단토는 예술 작품을 “구현된 의미 “, 즉 “무언가에 관한 대상이자 그것의 의미를 구현하는 대상"으로 정의했다.
웹 서핑하다 우연히 발견한 책인데 제목에 저항 없이 이끌려 읽게 되었다. 건축과로서 고대부터 근현대 건축사를 공부했었고 막연하게 근현대 미술사도 공부했었지만 학창 시절 제일 싫어하던 과목이 역사였던 나로서는 ‘탈역사’라는 단어가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슈퍼 이과생인 나로서는 항상 예술의 ‘정답 없음’에 혼란스러워했지만 단토가 이 책에서 밝혀낸 동시대 예술에 대한 생각들은 전례 없던 시대를 살아가는 예술인으로서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해주었다.
심미란 전염병보다 위험한 것임을 잘 안다.
우리는 근현대 미술 전시회에 가서 작품을 마주할 때 미를 좇기 위해 무언가를 찾지 않는다. 혹시라도 어떤 작품이 마음에 들어 그것을 ‘아름답다'라고 규정한다면 이말은 그것이 그 제작 방식이나 함축, 그것이 촉발하는 생각 때문에 그것이 우리의 관심을 불러일으켰음을 뜻한다.
책의 초반부에 나온 위 대목은 나를 완전히 몰입시켰다. 생각해 보면 참 맞는 말이다, 요즘의 전시회에서 우리가 단순히 시각적 아름다움만으로 감동을 느끼기는 쉽지 않다. 우리는 정신적으로 참신한 충격을 주는 작품을 볼때 감탄한다. ‘아름다움’의 기준이 바뀐 걸까?
예술은 바로 그 본성을 정당화할 수 있는 철학적 정의가 필요해지기 전까지는 자기 충족적이었으며, 그 주기는 예술이 더는 육안에 의존할 수 없을 때 종결된다.
단토는 이를 말함으로써 예술이 더 이상 시각에 의존할 수 없고, 지금이 그 시대임을 암시한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하는 의심이 드는 건 사실이다.
미학을 추구하는 것은 “예술사가 전개되는 동안 제작된 예술 대다수의 주된 목표”가 아니었다고 말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많은 전통적 예술과 일부 동시대 예술에는 틀림없이 미적 요소가 있다"라고 확언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단어는 ‘많은’ 과 ‘일부’이다. 과거에도 예술은 사회나 신을 풍자하거나 내면의 철학을 표현하는 용도로 쓰였다, 그러나 미술의 본질은 시각적 아름다움이었으나 현시대 예술은 상반된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게 단토의 생각이다.
“역겨움은 미와 대립하는 것으로서 미와 논리적으로 연관되므로, 미가 그렇듯 역겨움도 도덕과 연관될 수 있다"
이 책을 읽으며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구절이다. 뒤샹의 레디메이드 작품들과 워홀의 <브릴로 상자>가 왜 아름다운지 얘기하는 대목에서 나온 말인데, 나에게는 심상치 않게 다가왔다. 사실 뒤샹의 작품들이 아름답다기보다는 역겨움에 가깝다는 걸 어렵지 않게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을 읽으며 대학교 3학년 스튜디오 수업에서 교수님이 했던 말이 생각난다. 한 학생이 자기 작품에 주관적으로 “이 작품의 이 부분이 조금 못생긴 것 같다"라고 말했었는데 돌아오는 교수님의 혹평이 우리 모두를 놀라게 만들었다. 교수님은 “작품의 역겨움(丑)은 너네가 아직 실현할 수 없디. 작품의 못생김(丑)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고차원적이며 마음대로 실현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너희의 작품은 그냥 가치가 없을 뿐이지 역겹다는 말을 쓸 수 없다”라고 말했다. 사실 그 당시에는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교수님의 혹평에 혼란스러웠던 기억이 있는데 위 대목을 읽고 교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확실히 뒤샹의 ‘역겨움’은 아무나 만들어 낼 수 있는 게 아니다.
작품의 ‘역겨움’, 즉 작품이 함축하고 있는 너무나도 심오한 철학적 의미는 우리의 정신을 일깨워 준다는 점에서 새로운 종류의 아름다움으로 칭할 수 있다는 것이 단토의 뜻이다.
“예술 자체가 변한 듯합니다. 실제도 뒤샹 이후로 예술은 더는 시각적이지 않고 지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뒤샹과 워홀 이외에도 많은 동시대 예술가들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2018년 10월 뱅크시의 <풍선을 들고 있는 소녀>라는 작품이 약 17억에 낙찰되었을 때 액자 틀에 숨겨진 파쇄기로 인하여 반쯤 파쇄된 작품은 뱅크시의 철학을 강력히 함축한 채 <사랑은 쓰레기통에>라는 새로운 작품명으로 300억에 다시 낙찰된다. 이렇듯 이제는 작품 뒤의 철학이 미의 가치를 결정하는 절대적 요소가 되었음을 부정할 수 없을 듯하다.
“양식에 반항하는 미학을 실현하려는 충동은 한 개인을 지금까지 속박해 왔던 아주 강력한 형태의 심리적 강압에 반발한다는 점에서 이상주의 적입니다. … 이른바 자기 지시적 광고는 사이버네틱스 시대에 매체가 갖는 힘을 가장 피부에 와닿게 표상합니다. 마셜 매클루언이 말한 것과 달리 매체는 더는 메시지가 아닌데 이미 우리가 그것에 너무나도 익숙해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은 메시지가 매체를 이용합니다.”
단토는 동시대 예술가들이 이런 정신적 미를 추구하는 이유를 위와 같이 서술한다. 나는 이를 자본주의 사회의 자기 지시적 성질이 매체를 통해 무의식적으로 심리적 강압으로 구현되고, 이에 반발하려는 개인의 충동에 의해 양식에 반항하는 미학이 출현했다고 이해했다.
“우리의 동시대 서양 사회가 정신적인 것을 갈구하며, 예술을 그 욕망 충족 수단의 최우선 후보로 여기는 듯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실재를 재현하는 각종 방식은 작가의 능력에, 혹은 실재가 지각되는 방식 바깥에 있는 문화적, 정치적 요소에 좌우됩니다.
인터넷의 출현과 동시에 자본주의 사회의 자기 지시적 특성에 지배된 우리는 본능적으로 개개인의 정신적인 결핍을 예술을 통해 해소하려 하는 욕구에 의해 예술이 양식의 지배에서 벗어나 탈역사화 되었다.
이야기의 끝, 영화는 끝나도 삶은 계속됩니다. … 마르크스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모순이 해소되면 역사도 종결되리라고요. … 이제는 역사에 의해 주조되는 것이 아니라, 헤겔 역시 그러게 말하곤 했듯 그들 스스로 자기 삶을 창조한다. … 자유 관념이 모든 사람에게 일깨워지는 순간이 도래하면 모든 사람이 해방되어 자기 자신의 삶을 살아가기 시작한다는 것이죠. 그 즉시 역사는 끝나지만 삶은 계속됩니다.
단토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재가 바로 이 예술의 역사가 종결되는 그 순간이라고 말한다.
처음에는 비록 회의적이었지만 이 책을 읽으며 나도 단토의 견해에 꽤나 동의하게 되었다. 비록 모순은 해소되지 못할 것이고, 자유관념이 모든 사람에게 일깨워지는 순간도 아직은 다가오지 않았다 생각하지만, 인터넷으로 인해 개인은 더 이상 사회나 문화에 통제되지 않고 자기 자신의 삶을 살아가기 시작했다고 생각한다.
개개인의 철학은 모두 다르기 때문에 개인의 철학을 함축하는 동시대 예술의 특성상 하나의 양식으로 정의할 수 없다는 것이 결론이다. 하지만 몇 세기 이후에는 이런 다양성을 하나의 시대적 양식으로 정의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기도 한다.
인간은 끝없이 모든 것을 이해하려 한다. 그렇기에 한 시대의 예술을 하나의 ‘양식’으로 묶어 인식하려는 욕구는 자연적인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예술 작품에는 개개인의 철학이 투영되어 있고, 자유관념속에 살아가는 서로 다른 개인의 욕망을 과연 우리가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
예술을 하나의 양식으로 이해하려는 욕구는, 개개인을 하나의 사회에 규정지으려고 하는 욕구와 같은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본다.
이상 <예술과 탈역사> 해부 끝.
동시대 예술의 시각적 미의 상실과 철학적 함축의 현상은 건축학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후에 속편으로 이를 가볍게 분석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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