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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학

「미의 기원과 본성」

by imkykimm 2024. 2. 10.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사람들 사이에 가장 자주 이야기되는 일들이 통상 가장 적게 알려져 있으며, 다른 것도 많겠으나 그중에서도 미의 본성이 그러한 처지에 있다는 점을 지적하려고 한다. 모든 사람들이 미에 대해 논한다. 자연물을 보고 아름답다고 감탄을 한다. 예술 작품은 미를 구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줄곧 아름답네 아니네 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미가 존재한다는 것에 동의한다. 그러나 그들에게 미란 무엇인가 물으면, 그 누구도 선뜻 쉽게 대답하지 못한다.

 

칸트가 <판단력 비판>을 집필하며 미학을 하나의 독립적인 학문으로 만들기에 앞서, 디드로의 <미의 기원과 본성>이 그에게 길잡이의 역할을 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란 무엇인가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미를 단일성 혹은 전체의 부분들이 서로 맺는 정확한 관계로 환원하고, 또 그중의 한 부분을 전체로 간주하면, 그 부분의 부분들이 맺는 정확한 관계로 환원하고, 이런 식으로 무한히 환원시킨다. 내가 보기에 이것은 미의 본질이라기보다는 완정성의 본질을 구성하는 듯하다.

“적어도 당신이 지은 건물의 부분들이 서로 닮아있고, 크기가 같고, 적절히 조화를 이루고 있으니 이 모든 것이 일종의 단일성으로 귀착하여 이성을 만족시킨다는 점에 대해서는 어렵지 않게 동의할 줄 아오. … 하지만 신중하시오. 육체에는 진정한 단일성이란 절대 없소. 왜냐하면 육체는 무한히 많은 수의 부분들이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오. 그 하나하나의 부분들은 또 다른 무한한 부분들로 구성되어 있소. 그러니 설계도를 보고 건물을 지을 때 당신이 따르게 되는 단일성, 당신이 건축에서 위반할 수 없는 법칙으로 간주하는 단일성, 건물이 아름다우려면 반드시 모방해야 하는 그 단일성을 어디에서 보겠소. 그런데 지구상의 어떤 것도 완전하게 단일할 수 없으니, 그 무엇도 완전하게 그 단일성을 모방할 수 없는 것이 아니겠소? … ”

 

인간은 자신에게 결핍된 것을 추구한다. 완전한 단일성 이라는 것이 없기에 예술작품에서 단일성을 추구하고 그로부터 쾌를 느낀다는 것이 아우스티누스의 주장이다.

 

볼프 씨는 미와 미가 계기가 된 쾌를 혼동했고, 이를 또 완전성과 혼동했다. 그렇지만 아름답지 않아도 쾌를 주는 존재가 있고, 쾌를 주지 않고도 아름다운 존재들이 있다. 최대한 완전성을 가질 수 있지만 최소한의 ‘미’를 가질 수 없을 수도 있다. 후각과 미각의 대상 모두가 해당 감각과 관련지어 보면 그런 경우이다.

 

크루자 씨는 ‘다양성’, ‘단일성’, ‘규칙성’, ‘질서’, ‘균형’라는 특성과 함께 미를 정의하려고 하면서 자기가 미의 특징을 여러 개로 늘려놓으면 놓을수록 미가 점점 더 개별화되고, 미 일반을 다루고자 하면서 정작 특수란 몇몇 종류의 미에나 적용될 수 있을 뿐인 개념에서 출발했다는 점을 깨닫지 못했다.


쌔프츠베리는 미의 이러한 구분을 모조리 거부하고 미의 토대는 유용성에 있다고 주장한다.

“대상에 정해진 용례에 형태가 보다 잘 부합함에 따라서만 우리에 게 보기 좋을 뿐이라는 점을 증명하고자 할 것이다. 유행이라는 것이 그토록 자주 변한다면, 다시 말하면 우리가 대상에 형태를 부여해 놓고 이에 대한 취향이 그토록 일관되지 못하다면 그것은 이렇게 형태와 용례가 가장 완전하게 일치하는 일은 좀처럼 발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자연적이든 인위적이든 기하학이 아무리 섬세하게 계산을 해도 포착할 수 없는 일종의 '최고도(maximum)'가 있으며, 우리는 그 주위를 끊임없이 돌고 있을 뿐이다. 그 최고도에 가까이 다가가고 이를 넘어설 때 경탄을 하게 된다. 그러나 단 한 번이라도 그곳에 다다랐다고 확신하지는 못한다. 이 때문에 형태는 영원히 순환운동을 하게 된다. 이 형태를 버리고 다른 형태를 찾든가, 형태를 그대로 간직할 때는 끝도 없이 논쟁을 한다. 더욱이 이 최고도의 지점은 항상 같은 곳에 있지 않다. 많은 경우 이 최고도의 지점은 경계가 더 넓어지거나 더 좁아진다.“
“섀프츠베리는 계속해서 모든 사람들이 똑같이 주의를 기울일 수 없고, 똑같이 머리를 쓸 수도 없다고 말한다. 그들 모두는 더 인내심을 가졌거나 덜 가졌고, 더 배웠거나 덜 배웠고, 이런 식이다. 이렇듯 다양하니 어떤 결과가 생길까? 이런 이유로 아카 데미회원들은 코르네이유의 비극 『헤라클레스"에서 극의 전개가 대단하다 생각하겠지만, 민중은 줄거리가 뒤죽박죽이라고 생각한다.”

 

즉, 최고도는 개인마다 다르고 계속하여 변하기 때문에 쉽게 일치되는 지점을 찾기 어렵다는 것이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것은 아름다운 형태가 감탄을 일으키는 일차 원인인 것은 맞지만 단 하나의 원인은 아니라는 점이다. 디드로는 건축에서 장식물의 예를 들며 유용성의 미를 반박한다.

“건축에서 자연과 자연의 산물을 모방하는 것은 어떤 유용성이 있는가? 나무 기둥이 나 석재면 충분할 곳에 왜 장식을 하고 원주 기둥을 올려놓는가? 여인상 기둥을 세워 봤자 뭘 하겠는가? 원주 기둥이 사람 역할을 하게 세워진 것인가, 사람이 현관 모퉁이의 기둥 역할을 하는 것인가? 기둥 수평부에다 왜 자연물을 모방해서 새겨놓는가? 이렇게 모방할 때 균형이 제대로 지켜졌는지, 그렇지 않은지 하는 것이 뭐가 중요한 가 유용성만이 '미'의 토대라면 부조장식, 세로로 판 홈, 난간 모퉁이 장식 기타 장식은 모두 우스꽝스럽고 과잉이 되고 만다. 그러나 즐거움을 준다는 목적 하나뿐인 사물들에서 모방의 취향이 느껴지면, 유용성의 개념은 전혀 의식하지 않고 형태를 보고 감탄을 하곤 한다. 말 주인이 말의 형태를 꼭 말이 자기에게 해주는 봉사와 비교를 해서야 아름답다는 생각을 할지라도, 말을 소유하지 못한 행 인들의 사정은 전혀 이와 같지 않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매일같이 무엇에 쓰는 것인지 용도를 전혀 모르는 수만가지 꽃 초본, 자연물에 서 '미'를 발견한다.

허치슨 학파

허치슨 학파는 아름다운 사물을 구분하는 내적 감각, 즉 ‘여섯 번째 감각’이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의 마음은 쾌와 불쾌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인다. 사물을 고려할 때 질서, 균형, 모방을 발견하면 쾌를 느끼고, 무질서, 불균형, 불규칙성을 발견하면 불쾌를 느낀다. 이는 진화유전학적으로 일리가 있다.

그러나 쾌나 불쾌는 개별적으로 고려된 색, 소리, 연장의 단순관념에서 생기지 않는다.

“수많은 철학자들이 고려하는 듯한 단 하나의 감각의 쾌는 감각의 단순관념을 동한하는 쾌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름다운’, ‘규칙적인’, ‘조화로운’이라고 부르는 대상의 복합 관념에서 더 큰 쾌를 발견한다. … 음악에서 작곡된 음악곡이 주는 쾌는 음 하나가 대단히 달콤하고 풍부하고 낭랑할지라도 그 어떤 음 하나가 주는 쾌보다 훨씬 더 크다.”

 

그래서 허치슨 학파는 ‘아름다움의 내적 감각’이 틀림없이 존재하지만 ‘미’가 우리에게 일으키는 쾌에는 모호하고 파악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고, 이 쾌는 괜계 및 지각에 좌우되지 않고, 유용성의 관점으로는 이를 전혀 파악할 수 없고, 이 쾌를 맛보는 사람은 열성적으로 변해 보상을 준다 해도 위협을 가한다 해도 결코 흔들리는 법이 없다는 점을 증명하는 데 그칠 뿐이다.

“사치를 배격하는 준엄한 철학은 조상(조각)을 파괴하고, 오벨리스크를 무너뜨리고, 궁을 오두막으로, 정원을 숲으로 바꿔버릴 테지만, 그래도 이 대상들이 실제로 ‘아름답다’고 느낄 것이다. 내적 감각은 이 철학에 맞서 싸울 것이고, 철학은 제가 용기가 있었지 않았느냐면서 생색이나 낼 것이다.”

 

결국 미와 자본은 인류 문명에서 결코 떼레야 뗄 수가 없는 관계인 것이다.

 

허치슨 학파는 도형이 우리 감각에 다양성 속의 단일성을 느끼게 해준다고 생각한다. 대상이 똑같이 단일한 경우에는 더 다양할 때 그만큼 더 아름답고, 비교될 수 있는 면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만큼 더 형태가 다양하다.

 

즉 도형과 같은 공히 단일한 형태의 대상들 가운데에서 가장 다양성을 가진 것이 가장 아름답다. 그렇다면 역으로 공히 다양성을 가진 대상 가운데에서 가장 단일한 형태를 가진 것이 가장 아름다운 것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아무런 단일한 형태도 없고 대칭도 없고 통일성도 없는 조잡한 도형보다는 다소 단일한 (인식할 수 있는) 형태를 가지고 있는 도형이 쾌를 준다. 이는 인식할수 있다는, 통제할 수 있다는 감정에서 오는 쾌이다.

 

자연물 어디에서든 다양성 속의 단일성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어디에서든 다양성과 단일성이라는 두 특성이 상쇄되면 존재들은 모두 아름답고, 미는 항상 이 두 특징의 복합 비율에 비례함을 보게 될 것이다.

 

그들은 이런 다양성 속의 단일성의 법칙을 다른 에술의 산물에도 적용시키려 노력한다. “가장 훌륭한 성에서 가장 작은 건물로, 가장 세련된 작품에서 자질구레한 것으로 내려가, 단일성이 결여되면 어디에서나 변덕스러워지고, 다양성이 결여되면 건조해진다는 점을 보여준다.

허치슨은 두 가지 목표를 제시했다. 첫 번째는 미를 마주 볼 때 우리가 느끼는 쾌의 기원을 설명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개별적인 쾌가 우리 안에서 일어나게 되어 그 결과 우리에게 아름다운 것으로 나타나려면 존재는 어떤 특성을 가져야 하는지 연구하는 것이다. … 우리가 ‘미’에서 얻는 쾌의 근원을 육감의 도움 없이 설명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게 해주었다. 그러나 그가 제시한 ‘다양성 속의 단일성’이라는 원칙은 보편적이지 못하다.

앙드레 신부

앙드레 신부는 대단히 섬세하고 철학적으로 미 일반을 상이한 하위 범주들로 분류하고 이들 하위 범주를 아주 정확하게 일일이 정의한다. 하지만 미 일반에 대한 정의는 그의 책 어디에도 없다. 그는 책을 네 개의 장으로 구분했다. 첫 번째 장은 가시적인 미, 두 번째 장은 풍속의 미, 세 번째 장은 정신의 작품에서의 미, 네 번째는 음악의 미이다.

 

그들은 대상마다 첫째 절대적이고, 신이 만든 것일지라고 어떤 제도적인 것과도 무관한 ‘본질 미’, 둘째 신이 만든 제도를 따르지만 우리의 의견과 취향과는 무관한 ‘자연 미’, 셋째 다소 임의적이지만 항구 불변하는 법칙을 따르는 ‘인공 미’를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본질 미'는 규칙성, 질서, 균형, 대칭 일반으로 이루어진다. '자연 미'는 자연물에서 발견되는 규칙성, 질서, 균형, 대칭으로 이루어진다. '인공 미'는 우리가 제작한 인공물, 장식, 건축물, 정원 등에서 볼 수 있는 규칙성, 질서, 대칭, 균형으로 이루어진다. 그는 이 세 번째 '미'에 임의적인 것과 절대적인 것이 섞여 있음에 주목한다. 예를 들면 그는 건축에 두 종류의 규칙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 하나는 우리와는 무관한 '근본적이며 본질적인 미의 개념에서 비롯했다. 이 규칙이 있어서 기둥은 반드시 수직으로 세워야 하고, 각 층은 수평이 되어야 하고, 각 부분은 대칭이 되어야 하고, 그림은 우아하고 돋보여야 하고, 전체는 통일성을 갖춰야 한다.

 

이런 규칙들은 단지 맨 눈으로 했던 관찰과 모호한 사례를 토대로 세워졌으므로 항상 다소 불확실하고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 간혹 위대한 건축가는 이 규칙들을 넘어서서 정황에 따라 새로운 규칙을 상상해내고 수정하고 추가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예술작품에는 '본질 미', '인간이 창조해낸 미', '체계의 미'가 있다. '본질 미'는 바로 질서이고, '인간이 창조해낸 미는 예술가가 이 질서의 규칙을 자유롭게 의지에 따라 적용하는 것 보다 명확 하게 말하자면 그러한 질서를 선택하는 것이다. 체계의 미'는 관찰을 통해 생기는 미로, 이를 통해 대단히 박식한 예술가들 사이에서조차 다양성이 생기지만, 결코 넘어서지 못할 장벽으로서 본질 미'가 손상이 되는 일은 없다. '바로 이곳에 청동의 벽이 있도다. 간혹 위대한 거장들이 그들의 천재성이 이끄는 대로 이 장벽을 넘어서버리게 된다 면 그것은 아주 드문 경우이지만 규칙을 벗어날 때 미를 잃는 것이 아니라 더할 수도 있음을 예견했기 때문이다.

앙드레 신부는 '임의적인 미'를 '천재의 미', '취향의 미', '순수한 변덕의 미'로 세분한다. '천재의 미'는 '본질 미'에 대한 이해에 기반을 두며, 반드시 지켜야 할 규칙을 만든다. '취향의 미'는 자연물과 거장 의 작품에 대한 이해에 기반을 두며, '본질 미'를 적용하고 사용하게끔 해준다. '변덕의 미'는 아무 데에도 기반을 두지 않고 전혀 수용될 수 없다.

'인공 미'는 풍속에서는 국가의 관습, 시민의 정수, 시민법을 따르는것이고, 정신의 작품에서는 말의 규칙을 존중하고, 언어를 이해하고, 지배적인 취향을 따르는 것이고, 음악에서는 불협화음을 적절하게 삽입하고, 작품을 앞서 연주한 빠르기와 음정에 조화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앙드레 신부는 '본질 미'와 진리가 풍부하게 나타나는 곳은 오직 우주에서이고, '도덕 미'가 풍부하게 나타나는 곳은 오직 기독교 철학자에서이고, '지성 미'가 풍부하게 나타나는 곳은 오직 음악과 무대장치를 갖춘 비극에서라고 결론 내린다.

 

디드로는 앞서 제시한 저자들의 주장을 요약하며 그중에 앙드레 신부가 지금까지 이 주제를 가장 잘 심화시킨 사람이라고 밝히며 앙드레 신부의 ‘관계’ 개념과 함께 미 일반에 관한 그의 정의를 발전시킨다.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우리는 인공적이고 자연적인, 조정되고, 균형을 이루고, 결합되고, 대칭을 이루는 무수한 존재들의 개념에서 출발해서 질서, 배치, 균형, 결합, 관계, 대칭과 같은 긍정적이고 추상적인 개념 및 불균형, 무질서, 혼돈과 같은 부정적이고 추상적인 개념으로 나아갔다.”

 

이들은 경험적인 개념이다. 살아가며 우리는 자연스레 질서, 배치, 균형, 결합, 관계, 대칭과 같은 것은 긍정적으로 인식하고 불균형, 무질서, 혼돈과 같은 것들을 부정적으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의 생존에 있어 대부분의 위협은 자연의 비질서적인 것이고, 모든 인공적이고 대칭적인 피조물(도구, 집, 가축)들은 우리의 안전과 생존을 보장해주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아름답다고 부르는 모든 존재가 공통으로 가진 특징 가운데 어떤 것을 미라는 말을 기호로 삼을 수 있는 것으로 선택할 수 있을까? 어떤 것일까? 내가 보기에 그것은 무엇인가가 있어야 사물이 아름답게 되는 특징이라는 것이 명백하다. 그 특징이 빈번하게 나타나거나 드물게 나타날 수 있다면 그 빈도에 따라 사물은 더 혹은 덜 아름답게 되며, 그 특징이 부재하면 사물은 더 이상 아름답지 않게 된다. 종의 아름다움을 변화시키지 않고서는 본성이 바뀌지 않고, 반대가 되는 특징이 있다면 가장 아름다운 것이 불쾌하고 추해진다. 한마디로 말해서 이 특징으로부터 미가 출발하고, 증가하고, 무한히 변화하고, 쇠락하고 사라진다. 그런데 이런 결과를 가능하게 해주는 것은 ‘관계’ 개념밖에는 없다.”

 

앙드레 신부는 단일성과 규칙성, 질서, 대칭, 균형 등은 신의 속성이며, 신의 피조물인 자연에 이러한 속성이 들어 있고, 또 인간은 이러한 속성을 자신이 만드는 작품에 구현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 속성을 통합하는 것이 ‘관계’라는 개념이라 본 것 같다.


미에 대한 인간 오성의 작용

“그러므로 내 오성에서 관계의 관념을 일깨우는 것을 그 자체로 포함하는 모든 것을 내 외부에 존재하는 미라고 부르고, 이 관념을 일깨우는 모든 것을 나와 관련한 미라고 부를 것이다.”

예를 들어 루브르 정면은 오성에서 관계의 관념을 일깨우는 것을 그 자체로 내재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은 ‘내 외부에 존재하는 미’ 혹은 ‘실제 미’이다.

 
“이 건축물의 각 부분이, 이 음악곡의 음들이 서로 또는 다른 대상 사이에 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지각하고 느끼는 것으로 충분하다. … 이 관계를 지각하는 데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쾌가 동반된다는 점을 미루어 보면 미는 이성보다는 감정에 관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 그래서 쾌가 느껴지려면 오성이 이 대상은 아름답다고 선언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게다가 같은 경우에 판단은 거의 항상 ‘상대 미’로부터 나오는 것이지 ‘실제 미’에서가 아닌 것이다.”
”이 관계를 풍속에서 고려하고 도덕의 미'를 가지거나, 문학 작품에 서 고려하고 '문학의 미를 가지거나, 음악 작품에서 고려하고 '음악 의미를 가지거나, 자연물 속에서 고려하고 '자연 미'를 가지거나, 인간의 공예품에서 고려하고 '인공 미'를 가지거나, 자연물이나 예술 품을 재현하는 데에서 고려하고 '모방의 미'를 가지거나 한다. 하나의 대상에서 관계를 어떤 목적으로 고려하든, 어떤 양상으로 고려하든, 미는 다양한 이름을 가질 것이다.

그러나 동일한 대상은 그것이 무엇이건 간에 그 자체로 홀로 고려될 수도 있고 다른 것과 상대적으로 고려될 수도 있다. 내가 어떤 꽃을 보고 아름답다고 말하거나, 어떤 물고기를 두고 아름답다고 말할 때 이는 무슨 말인가? 내가 이 꽃, 이 물고기를 고립시켜서 고려한다면, 내가 이 꽃과 물고기를 이루는 부분들에 질서, 배치, 균형, 관계가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는 것 말고는 다른 말이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모든 꽃은 아름답고 모든 물고기는 아름답다. … 그것이 내가 ‘실제의 미’라고 부르는 것이다.“

 

쉽게 말해 한 객체가 내재한 관계들로부터 미를 유추해낼 때 사용되는 것은 ‘실제 미’이고 객체 외부의 것들과의 관계로부터 미를 유추해 낼 때는 ‘상대 미’의 개념을 사용하는 것이다.

“코르네이유의 비극 <오라스 가>에서 나오는 “죽어야지!”라는 숭고한 대사를 모르는 이는 없다. 나는 이 연극을 본 적이 없고, 늙은 오라스가 이렇게 대답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에게 "죽어야지"라는 표현을 들으면 어떤 생각이 드는지 묻는다. 내 질문을 받은 사람은 이 '죽어야 지'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고, 이것이 완전한 문장인지 문장의 한 부분인지 알 수 없고, 이 세 단어 사이에 어떤 문법적 관계가 있는지 잘 알 수 없기 때문에, 이것이 미인 것도 추인 것도 아닌 듯 보인다고 분명히 내게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그에게 이것은 전쟁에서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이냐는 물음에 대한 답변이라고 말한다면, 그는 이 답변에서 죽는 것보다 사는 것이 항상 좋은 것이라고 믿게 하지 못하는 용기 같은 것을 발견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그는 죽어야지'라는 표현에 흥미를 갖기 시작한다. 내가 덧붙여 이 전투에 조국의 영예가 달렸고, 싸우는 사람이 질문을 받은 사람의 아들이고, 그것도 그에게 남은 유일한 아들이고, 그 젊은이는 형제 둘의 목숨을 빼앗은 세 명의 적과 맞서고 있고, 늙은이는 지금 자기 딸에게 말하고 있고, 그 늙은이는 로마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때 아름답지도 추하지도 않았던 이 죽어야지'라는 답변은 정황과 함께 관계를 설명해 나감에 따라 아름다워지고 결국 숭고해지기에 이른다.”

 

그러므로 미는 관계와 더불어 시작하고 성장하고 다양해지고 쇠락하다가 사라진다.


비판

미를 순전히 경험적으로 설명하려는 디드로의 이러한 말은 물론 미의 특성을 흐릿하게 하고 또 미를 자연적 내지 도덕적으로 완전한 것 즉 ‘객관적으로 ‘합목적적인 것’으로 해소해버리는 위험성을 지니고 있다.

 

요약

디드로가 앙드레 신부에게서 발견한 것은 예를 들어 예술작품의 규칙은 대체로 주관적이거나 임의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미란 사람마다 다르게 느껴지는 주관적이고 변덕스러운 것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을 잃는다. 건축, 음악, 시 등에서 제시된 규칙들은 자연에 존재하는 법칙을 오랜 시간에 걸쳐 주의 깊게 관찰한 결과이다. 만일 규칙이 수정되거나 다른 규칙이 세워진다면 그것은 기존의 규칙 이 임의적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 규칙을 만든 관찰이 불확실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천재와 대가는 “규칙을 넘어서서 정황에 따라 새로 운 규칙을 상상해 내고 수정하고 추가하기도 한다."

디드로가 허치슨에게서 찾았던 것은 개인의 미적 판단 자체의 유효성 및 절대성이다. 개인에 따라 다른 ‘내적 판단’이 있다는 것이다.

 

미를 수용자의 외부에 둔 앙드레 신부의 의견과 미를 수용자의 내적 감각 판단으로 보는 허치슨의 의견이 이렇게 갈라진다.

 

디드로는 ‘관계’라는 추상적인 개념으로 이 두 의견을 통합시키는 시도를 한다.


디드로의 관계들의 지각

디드로는 음의 힘을 빌려 ‘관계’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설명하려 든다.

“[음이] 진동할 때 등시성(isochronisme)이 지켜지지 않아서 음의 관계가 [단일하지 않고 변하게 될 때 감각기관은 슬픔(le chagrin) 을 느끼게 된다. 감각기관은 그 감각기관을 자극한 음이 그 음 앞에 나왔던 음, 그 음과 동시에 들리는 음, 그 음을 뒤따르는 음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 점을 통해 음악적 쾌는 음의 관계들의 지각이라는 점이 증명된다."

 

일반적으로 두 음 사이의 관계가 가장 단순할수록 우리 귀에는 기분 좋게 들린다. 즉 두 음이 한 옥타브 차이가 나는 1:2의 관계일 때가 그 경우이다. 음의 관계를 표현하는 수가 커지면 커질수록, 즉 두 음의 관계가 복잡하면 복잡할수록 쾌가 줄어드는 까닭은 이러한 관계를 지각하는 데 더 많은 재능과 연습과 주의력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음의 관계를 무한히 세분화할 수는 없다. 듣는 사람의 청각 지각 능력에 한계가 있어서 지나치게 크거나 낮은 진동수를 구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이론적으로 한 음계의 음은 무한히 분할 가능하지 만 음악예술의 대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음은 일정하게 제한되어 있다.

 

디드로는 음들 사이에 일정한 수학식으로 표현될 수 있는 "관계가 존재하고 이러한 관계를 지각하는 데서 미적 인식이 비롯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이는 단지 음악이나 건축에 국한된 경우는 아닐까? 다른 예술에서는 사정이 다르지 않을까? 하지만 디드로는 음악의 미적 판단 과정을 다른 예술에도 똑같이 적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기원은 음악의 쾌에만 특별한 것은 아니다. 일반적으로는 관계들의 지각이다. 이 원칙은 시, 회화, 건축, 도덕, 모든 예술과 모든 학문에 적용된다. 우리가 아름다운 기계, 아름다운 그림, 아름다운 주랑을 보고 즐거움을 느끼는 것은 오로 지 이들 속에서 관계를 알아보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연주회처럼 아름다운 삶도 그러하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감탄하고 즐거움을 느끼는 토대가 되는 것이 관계들의 지각이다.”

 

그가 ‘관계’에 주목하는 것은 어떤 대상이 개별적으로 우리에게 쾌 혹은 불쾌의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는 있지만 그것을 그 대상 자체에 미적 특성이 있다고 볼 수도 없고, 우리의 기분, 기질, 정황에 따라 대상을 보는 관점이 달라진다고 볼 수도 없기 때문이다. 음 하나하나, 색 하나하나가 그 자체로 쾌나 불쾌를 일으키기는 하지만 아름다움의 감정은 항상 이들이 다른 것과 맺는 관계를 통해서 생긴다.

 

근본적으로 예술작품을 아름답거나 추하다고 판단하는 근거는 그 작품을 구성하는 개별 요소들 자체에서 찾아서는 안 되고, 예술가가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이들 요소를 배치하는 방식, 그리고 수용자가 이러한 배치의 방식과 차이를 지각하는 데서 찾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똑같은 표현이라도 누가 어떤 상황에서 말하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갖게 되고 이에 따라 독자는 완전히 다른 감정을 느끼게 된다. 따라서 아름다움은 시어 자체에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시어가 전체적으로 맺는 무수한 관계들을 지각할 때 비로소 느껴지게 된다. 이 문제를 좀 더 깊게 살펴보자. 디드로는 드라쇼 양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에스』에서 한 문장을 인용한다. 그는 이미 “미와 미가 계기가 된 쾌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아름다움이 우리에게 쾌를 불러일으키기는 하지만, 쾌 자체를 아름다움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한 예로 음악의 협화음은 개별적으로 놓고 봤을 때 언제나 듣기 좋고, 불협화음은 그렇지 못하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불협화음, 혹은 불쾌한 느낌을 주는 요소를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예술작품에서 항상 제거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음악에서 불협화음을 사용하는 것도 똑같은 이유이다. 불협화음 자체는 우리 귀를 거스르므로 피해야 할 것으로 간주되기 쉽다. 그러나 한 예로 7화음은 오랫동안 불협화음으로 간주되었지만 그렇다고 악곡에서 전혀 사용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7화음의 7도 음을 때로는 반음 상행하여, 때로는 반음 혹은 온음 하행하여 불쾌감을 상쇄할 수 있다. 이렇게 될 때 악곡은 으뜸화음으로 되돌아가려는 긴장감이 더욱 강하게 느껴지게 되므로 보다 극적인 효과를 얻게 된다.

 

음악에서 불협화음은 다소 빈번히 사용된다. 그러나 거의 항상 불협화음을 반드시 사용해야 한다. 음악가들은 보통 불협화음 이 준비되고 해소되기를 바란다. 당연히도 이점이 의미하는 바는 귀에 복잡한 관계를 제시하기 위해 단순한 관계를 버릴 이유가 충분하다면 즉시 다시 단순한 관계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가장 초보적인 단계에서 대칭과 균형과 같은 단순한 관계가 선호되리라는 것이 자명하다. 그래서 건축물이 아무리 화려하게 장식이 되었더라도 결국 전체의 구성은 이러한 단순한 관계의 표현으로 환원돼 고음 악곡이 아무리 길고 복잡할지라도 결국 처음에 시작한 조성으로 돌아와 끝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인간의 감각기관은 공통적으로 이렇게 대칭과 균형을 이루지 않고 관계가 복잡해지면 불안해지고 아쉬움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앙드레 신부가 절대 미의 특징으로 본 것이 바로 이러한 단순한 관계이다. 그러나 바로 이점 때문에 대칭과 균형의 지각으로 귀결하기 전에 종지를 늦추고 일정 부분을 반복하여 감각기관과 오성에 불안감과 긴장을 가중시킬 때 전체적인 예술작품의 표현력은 더욱 증가할 것이다.

 

여기에서 디드로가 미를 "관계들의 지각으로 보고자 하는 이유를 찾을 수 있다. 그는 「미」항목에서 “미를 관계의 지각에 두어보라. 세상의 처음부터 오늘날까지 미가 진보해 온 역사를 알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단순한 관계들로만 이루어진 예술 작품은 어린이도 쉽게 그 관계를 지각할 수 있기 때문에 미적 쾌감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예술을 깊이 이해하고 감식력이 뛰어난 어른이라면 단순한 관계로만 이루어진 작품을 단조롭고 지루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런 이유로 미적 판단이 무한할 정도로 다양하게 된다. 허치슨이 주장한 개인의 미적 판단 자체의 유효성과 절대성의 토대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그가 “관계들의 지각" 이론을 내세운 더욱 중요한 이유는 당대 예술이 처한 상황에 대한 인식에서 찾을 수 있다. 현대의 예술사 가들은 이 시기를 가리켜 흔히 "로코코 시대라고 하는데, 일정한 예술 양식을 성취했다기보다 많은 예술가들이 경박한 '매너리즘에 빠져 있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자연과 인간을 깊이 있게 연구하고, 자신의 예술을 공들여 연마하고, 선택한 주제에 적합한 표현과 이를 위한 새롭고 창조적인 표현의 방식을 창안하는 대신, 도덕과 모범을 무시하고 유행하는 취향에 따라 쉽고 가볍게 그림을 그리고 시를 짓는 경향이 팽배했다.

 

이러한 경향의 근본에는 모든 사람이 각자 다른 주관적인 취향을 갖고 있다는 미적 회의주의가 있었다. 이러한 회의주의의 주장에 따른다면 훌륭한 작품과 그렇지 못한 작품을 구분하고 평가할 수 있는 근거가 없게 된다. 모든 사람이 각자 예술 작품을 평가하는 기준이 다른데 어떻게 한 작품의 좋고 나쁨을, 훌륭하고 평범함을 따질 수 있을 것인가. 그렇다면 절대적인 아름다움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아름다움은 틀림없이 존재한다. 그리고 겉으로 보기에 아름 답지만 실제로는 아름다움을 갖추지 못한 예술 작품이 있다. 다수 혹은 영향력을 가진 사람의 의견으로는 아름답다고 간주되지만 사실은 그렇지 못한 예술 작품이 있다. 한 예로 프랑스 신구논쟁에서 호메 로스를 놓고 의견이 극단적으로 갈라졌다. … 호메로스 시에서 넘쳐나는 이미지들과 그 시적 효과를 모든 사람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섬세하고 정밀한 이미지들을 시인이 전체 구성에서 고려한 효과를 살려 내어 모두 지각하기 위해서는 오랫동안의 독서가 필요하고 훌륭한 감식안이 있어야 한다.

 

디드로는 누구든 자유로이 미를 판단하고 자신의 미적 판잔이 그 누구의 의견이나 권위에 의존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예술가들이 추구해야 할 ‘완전성’과 ‘독립성’을 ‘관계들의 지각’이라는 개념으로 풀고자 노력하면서 디드로는 그들이 성취한 높은 수준의 아름다움을 언젠가 모든 사람이 이해하고 향유할 수 있게 되기를 기다리고 또 이를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마무리하며

 

디드로가 핵심적으로 사용하는 ‘관계’ 개념은 현시대 철학자 그레이엄 하먼이 객체지향 존재론을 통해 밝힌 미학과 유사한 부분이 상당 부분 존재한다. 다음으로는 그의 저작 <건축과 객체>를 리뷰하며 그 유사점을 알아보도록 하겠다.

 

이 책을 읽으며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생각이 있는데, 이 책은 1752년에 출판되어 고전주의 (로코코)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인류 문명의 발전 수준을 고려하면 당시에는 아직 자연의 큰 위협들과 공존하며 살았기 때문에 단일적이고 완정적인 예술을 추구했다는 추론을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반면에 현대에는 기술이 너무 발전한 나머지 인류의 안전이 보장된 것은 물론 인간은 더 이상 도파민의 자극 없이는 못 살아가는 동물로 변질되었다. 이런 시대적 배경이 고전주의의 대칭적이고 조화로운 예술보다는 날것이고 공포감, 스릴감을 안겨주는 예술의 양식으로 변환되었다고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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