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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의 형태는 시대를 반영한다」 양용기

by imkykimm 2024. 6. 22.
 
건축의 형태는 시대를 반영한다
 

 
이 책의 저자는 건축의 형태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고 한다. 근대 이전의 형태는 제1의 형태, 근대 이후의 형태는 제2의 형태이다.
 
고대, 중세, 근세 그리고 근대로 시기의 구분은 어느 날 갑자기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어떤 사건에 의해서 나뉘었을 것이다. 이 책에서는 그 사건을 살펴보고 그것이 시기별로 건축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설명하고자 한다.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건축이 어떻게 시대를 반영하는지에 대해 서술한 이 책은 건축의 시각에서 세계사를 새롭게 바라보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1 | 고대

고대 이집트

고대 이전 선사시대의 건축물은 제1차적인 기능인 가연과 맹수로부터 보호하는 역할을 하다가 고대에 들어서며 건축은 종교로부터 디자인적 기능을 부여받아 사회에서 정보전달의 역할을 한다.
 
우선 건축물에 대한 정의가 필요한데, 동일한 사물에도 기준에 따라 답이 달라지기 마련이다. 보통 건축물의 기준은 공간이 인간을 위한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공간이 되기 위한 기준은 무엇인가. 지식을 쌓는다는 것은 곧 기준을 많이 가진다는 것이다. 시대별 지식의 축적정도와 기준에 따라 건축물의 기준도 달라지기 마련이며, 이런 상이한 기준이 건축의 형태를 좌우한다. 
 
고대와 중세 역시 어느 하나의 기준에 따라 나뉘게 되는데, 이 책에서는 고대를 신인동형, 그리고 중세는 기독교라는 신본주의에 바탕을 둔 종교적 기준으로 나눈다고 한다. 
 
피라미드가 건축물이 되느냐도 하나의 논쟁거리이다. 신인동형의 고대에서 이집트는 태양신의 영향을 크게 받았고, 사후 세계를 믿었기에 미라를 중시했다. 그러나 피라미드는 미라를 보관하는 무덤이지만, 아무리 왕의 권위가 크더라도 피라미드의 크기는 과할 만큼 거대하다. 인간을 위한 공간이 없기 때문에 조형물로 간주되기도 했지만, 피라미드 안에 사람을 위한 공간이 있음이 밝혀지고, 피라미드의 크기는 단순한 무덤 이상의 사회적인 역할을 가지고 있었기에 건축물로 간주될 수 있었다. 
 
태양신을 따르는 이집트에서는 해가 뜨는 동쪽은 희망적이고 생명을 나타내며, 해가 지는 서쪽은 죽음을 상징한다. 따라서 나일강 동쪽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고, 나일강 서쪽에 피라미드가 있다. 더구나, 사막의 끝없이 펼쳐진 지평선에서는 위치를 인식할 수 있을만한 이정표가 필요했으며, 피라미드의 거대함이 그 역할을 한 것이다. 따라서 피라미드의 형태는 현대에서도 오아시스 같은 도시의 랜드마크적 의미로 쓰인다.  

그리스 로마

그리스는 부족 국가의 성격이 강했으며  부족 대부분이 신화를 가지고 있었다. 지형이 험난했기에 신에 의지하며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경향이 컸고, 지도자는 목적을 달성하는 게 있어 신화를 적용하려 하였기에 원형극장을 통해 신들의 존재를 알리려 했고, 신전을 만들어 양심을 자극했다. 따라서 그리스 지역에는 신전과 원형극장이 그룹을 이뤄 모여 있으며 신전 자체에 도시의 형태를 만들어 입구(하이퍼 홀hyper hall)와 신전을 구분함으로써 여러 축을 가지고 있는 소도시적인 성격을 가지었다.

그리스 도시 평면, 판테온 신전

로마는 오랜 기간 유럽 대부분의 영토를 차지하여 사각형의 도시형태를 구획해 모든 도시는 대로와 연결되도록 했는데, 이는 로마에 빠르게 도달할 수 있도록 한 것으로,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탄생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대로의 끝에는 반드시 개선문을 만들어 권위를 세웠는데, 군대가 통과할 수 있도록 넓은 폭을 만들기 위해 연구하다가 탄생한 것이 반원 아치이다. 
 
이 반원 아치가 발전된 것의 대표적인 건축물로는 판테온 신전이 있다. 판테온 신전 내부는 완전한 구의 형태를 갖추고 있으며 지붕 꼭대기에는 오쿨루스, 즉 눈이라고 불리는 구멍이 있다. 이것은 의도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거의 8미터에 가까운 키스톤이 커서 제 역할을 할 수 없고 온전히 하중이 전달되어 밑으로 떨어질 수 있는 위험으로 인해 구조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비워 둔 것이라는 것이 작가의 견해이다.
 
로마의 건축에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당시 수로는 발전했지만 폐수 시설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 배설물을 창밖으로 버리는 일이 흔했다고 한다. 이런 경우 도로 쪽의 사람이 오물을 맞을 확률이 컸으므로 여자를 안쪽으로 걷게 하고 남자가 도로 쪽으로 걷게 되었다. 그래서 과거 남자들은 챙이 있는 검은 모자와 긴 외투를 걸치었고 도로에 쌓인 변이 많은 탓에 여자들은 굽이 높은 신을 신게 되었다고 한다. 여자를 인도에서 안쪽으로 걷게 하고 남자가 도로 쪽으로 걷는 에티켓의 유래는 로마에서 시작된 것이다.

2 | 중세

중세는 로마에 기독교가 등장하며 시작한다. 로마는 노르만 민족과 데르만 민족의 등장과 함께 영토가 여러 영역으로 나뉘는 등 오랜 혼란의 시기를 겪다가 콘스탄티누스가 로마를 다시 통일시켜 로마 제국을 부흥시킨다. 이때 콘스탄티누스가 로마 제국을 오래 지속시킬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기독교의 공인이다. 로마는 고유의 종교가 없었으며 그리스와 이집트를 점령하며 그리스 신화, 태양신 그리고 황제 등 각 지역마다 숭배하는 존재가 달랐다. 계속되는 반역과 침략에 안정된 정치를 펼치기 어려웠을 때 기독교가 여러 종교를 대체하며 로마 제국의 전 지역을 종교적으로 통합한다. 로마는 비잔틴으로 수도를 옮기며 기독교가 세운 교황의 시대를 시작한다.
 
중세는 비잔틴, 로마네스크 그리고 고딕으로 이어진다. 이 시대에 등장하는 건축물도 모두 기독교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한 것이다. 각 시대의 건축물을 살펴보면 지붕의 형태와 높이가 모두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 시대 건축물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수직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수직성은 소망이나 방향 그리고 신을 향한 바람을 나타내는 것으로, 근대에 들어 심리상태를 나타낸 표현주의가 수직성이 가장 강한 고딕의 형태를 취한 것도 바로 수직의 상징성 때문이다. 중세에 들어 서로마가 멸망하며 정치에 변화의 바람이 일고 봉건주의가 강해지는 등 그 시대를 반영한 건축물이 등장하지만 그 바탕에는 기독교 정신이 주를 이루고 있다. 
 
기독교의 등장과 함께 신인동형론의 바탕을 이룬 고대의 시기가 매듭을 지었는데 초기 기독교가 세상에 등장할 때 비잔틴이 함께 등장했다. 로마의 정세 불안이 경계를 나타내는 첨탑에 고스란히 나타낸다. 석조건물이 절정을 이루는 중세에는 구조적인 불안감이 첨탑의 증가 현상으로 나타나고 특히 로마황의 정치적인 불안함이 시작되는 중세에는 자체적인 경계를 갖추려는 욕구에서 건물은 외부 영역, 중간 영역 그리고 개인 영역을 이루는 3단 분리를 이루게 되는데 이는 형태에도 반영된다. 중세의 시작인 비잔틴, 과도기의 로마네스크 그리고 중세의 절정을 이루는 고딕에서 건물의 외형은 큰 차이를 나타낸다.

비잔틴

기독교 시대가 시작되기 전까지 로마에는 바실리카가 대표적인 건축 형태로 자리잡고 있다가, 기독교 시대가 시작되며 평면에 원형이 추가되고 십자가 형태로 변화한다. 비잔틴의 대표적인 건축물로는 성 소피아 성당이 있는데 성 소피아 성당의 원은 로마의 돔과는 다르게 하늘을 상징하는 것이며 후에 러시아에서 돔 형태의 건축물을 쉽게 볼 수 있는 것은 비잔틴으로부터 전해진 동방 정교회의 영향 때문이다. 그러나 러시아의 돔 형태는 겨울이면 쌓이는 눈 때문에 하중이 발생할 수 있어 규모도 작아지고 수직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병사들의 투구 모양으로 변화하였다. 
 
로마의 돔은 하부 구조와 일체형이고 비잔틴은 두 개의 형태로 구분된다. 로마 시대는 기독교가 공인되기 이전이기 때문에 돔의 형태는 공간 형성을 위한 구조적인 목적이었다면 비잔틴은 기독교 공인 후 교회 하부를 기독교 성인들의 무덤으로 사용하게 되면서 지하는 동양의 무덤 형태를 띤다. 지붕에 있는 돔은 하늘의 반구 형태를 따른 것이며 그 사이 공간은 인간의 세계를 의미라는 것으로 공간을 분리할 목적으로 3 분리 공간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바실리카, 성 소피아 성당, 러시아 성 바실리 성당

로마네스크

로마가 멸망하고 로마 정교회, 동방 정교회 그리고 프랑크 왕국의 세력 다툼이 심해지며 기사의 역할이 중요해지고, 기사가 공을 세우면 영로를 받아 귀족이 되는 봉건제도가 생겼는데 이렇게 자신의 땅에 자체적인 방어력을 키우고자 등장한 것이 성곽이다. 이것이 로마네스크 건축의 특징이다. 처음에는 침략에 방어하는 요새의 기능이었지만 오랜 시간이 흘러 이 요새가 점차 도시형태를 갖게 되었다. 먼 거리를 감시하기 위한 첨탑과 함께 수직적인 요소가 건축물에 등장하고 기독교가 전성기를 맞으면서 수도원이 점차 소도시와 같이 여러 기능을 갖게 되었다. 수직적인 형태의 건축물이 등장하면서 3단 형식을 갖추게 된다. 
 
궁궐이나 성곽 같은 건축물을 축조하기 위해서는 다수의 인원을 동원해야 하지만 국가의 세력이 분권화 되면서 돔을 축조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변화한 것이 바로 지붕인데, 지붕과 벽이 만나는 부분에 오히려 디자인의 가능성이 생겨났고 이에 장식적인 모양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일반 건물에 3단 규모의 공간 층이 생기면서 1층은 노동인구와 집기들을 위한 공간으로 사용되고 중간층은 공용공간으로, 상층은 개인 공간으로 구분되기 시작한다. 다층 구조의 건축물은 로마네스크에서 시작된 것이다. 건축의 수직성과 중정은 로마네스크의 성곽과 첨탑, 그리고 수도원에서 시작된 것이다.
 

고딕 시대

봉건주의제도 아래에서 교회의 막강한 이미지를 강조하기 위해 더 강렬한 형태의 교회 건축물이 필요했는데, 로마네스크 건축은 두꺼운 벽이 갖는 무게 때문에 위로 더 치솟기에는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벽을 개방하면서 버트레스와 같은 지지대로 받치는 형태의 건축물을 만든 것이 고딕 양식이다. 얇아진 벽에 의하여 창이 채광의 역할을 부여받게 되었고, 따라서 창의 활용에 주목하게 되었다. 
 
벽에 하중을 줄이기 위해 벽에 성경의 내용을 조각하기 시작하며 장식적인 요소를 가지게 되었고, 밖으로 드러난 뼈대는 익숙지 않은 흉물스러운 느낌을 준다고 '야만적인'을 뜻하는 '고딕'으로 불리게 되었다. 고딕 이전의 건축물들은 대부분 필요 이상의 두꺼운 벽 두께를 갖고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높은 건축물을 만들 수 없었는데 고딕은 하늘을 향하여 좀 더 높이 올라가려는 방법으로 벽의 무게를 줄이려고 머리부터 발끝가지 문신을 새기듯 음각 벽을 만들고 얇아진 벽에 플라잉 버트레스라는 지지대를 만들어 건축물의 형태를 해골처럼 앙상하게 만든 것이다.
 
300년에 걸친 십자군 전쟁 이후 신앙심이 약해진 유럽에서 고대 로마를 재건하고자 하는 르네상스의 열망은 동로마 멸망 후 신본주의가 아닌 인본주의 시대를 꿈꾸는 인문학자들에게로 옮겨갔다. 이것은 동로마 멸망 후 로마 교활청이 있는 로마보다는 당시 교류가 활발한 도시 피렌체가 배경이 되었다. 비교해 보면 지금의 이탈리아 지역과 다른 지역의 고딕 건축물에서 아치의 형태가 분명히 다르게 나타는 것은 고대 로마를 지향하는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시대를 향한 건축물을 지향하는가 하는 각각의 의도에 따른 것이다.

파리 노트르담 성당 / 이탈리아 밀라노 대성당

 
고딕의 플라잉 버트레스 같은 부벽은 당시에는 구조적인 기능이었지만 현대에서는 리처드 마이어등이 즐겨 쓰는 디자인 기법이 되기도 했다.

르네상스

십자군 전쟁으로 기독교의 세력이 약해졌으나 기독교는 신성 로마 제국의 정신적인 줄기였다. 그러나 동로마가 멸망하자 이는 정신적인 충격으로 다가왔고 이 사건으로 인해 기독교에 바탕을 두었던 모든 사회의 틀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것이 중세의 마지막을 고하는 사건이 되었으며 동로마 비잔틴에 거주했던 로마인들은 다시 서로마로 피신하여 새로운 시대의 필요성을 요구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최초의 인문학이다.
 
가장 중요했던 영적인 분야를 담당한 종교 개혁이 바탕이 되고 라틴어 위주의 문서와 정보가 인쇄술의 발달로 각 나라의 다양한 언어로 출판되면서 시민들이 깨어나고 본질을 알게 되는 과정을 통해 인문주의를 바탕으로 근세로 향하는 기초가 되었다.
 
특히 절대적이었던 교황청의 권력이 헨리 8세에 의하여 추락되는 사건은 국왕들에게 새로운 계기를 부여해 주었으며 교황청과의 결별이 가능하다는 것을 암시하게 해 줬다. 로마로 피신한 학자 중 역사학자인 레오나르도 브루니와 인문학자 잔노초 마네티가 제창한 인문주의 이론이 힘을 얻게 된다. 신앙적인 것보다는 역사적인 부분을 더 강조하는데 이를 위하여 전통을 바탕으로 고대 그리스와 고대 로마의 철학과 사상을 기초로 하려는 의도가 보인다. 마네티의 이론은, 중세에는 문장의 주어가 대부분 예수였다면, 지금은 인간이 주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레오나르도 브루니 ‘학예부흥’
1. 인간의 성질을 알려는 욕구가 있다.
2. 한 개인의 성과를 중요시하는 경향이 있다.
3. 지금 현세의 삶을 천국에서의 삶보다 중요시하는 경향이 있다.
4. 클래식 작품을 중요시하는 경향, 여기서 클래식은 그리스 로마와 문명을 뜻한다.
5. Grammer(문법), Rhetoric(웅변), Poetry(시), History(역사)의 발달 등
6. 인간을 찬양하고 영광스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지아노초 마네티 '인간이 주인공' 
1. 인간은 이 세상의 주인이며 왕이며 황제이다.
2. 인간은 아름답고 예수 그리스도를 인간의 형상으로 나타내는 것도 괜찮다.
3. 인간의 몸은 이 우주의 조화를 나타내는 생물이다.


 
중세의 건축은 신본주의를 지향하는 이미지로 수직적인 형태가 등장하는데 이는 신에 대한 소망을 담은 것이다. 그러나 근세는 이를 탈피하고자 다시 고대의 수평적인 이미지를 재구성하려고 시도한다. 르네상스 건축은 수직적 중세건축과의 근본적인 단절, 로마 개념의 복귀, 형태가 분화되고 위계적이며 통합된 조화이다. 
 
고대는 신인동형의 시대로 인간을 신격화하여 많은 동상을 만들었지만 중세는 신본주의였기에 신 외에 다른 형상의 동상은 금기시되었다. 하지만 근세에 들어 곳곳에 동상들이 다시 등장한다. 

르네상스는 신의 기준에서 인간의 기준으로 다시 만든다는 것을 뜻하며, 예술도 신적인 것보다는 좀 더 현실적으로 바뀌어야 했기에 사실적인 표현이 주를 이루게 된다. 중세까지 불가능했던 누드화가 근세에 들어 자연스럽게 등장하는 것을 보면 기독교가 과거처럼 강하게 작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세 미술을 보면 성스러운 이미지 전달에 목적을 두었기 때문에 그림을 보면 모두 알 수 없는 무표정한 얼굴이고 그림이 모두 수직적인 구도를 갖고 있는 반면 르네상스 그림은 삼각형 구도와 함께 원근법을 줄곧 사용하며 사실적인 표현을 지향한다. 중세는 오로지 신앙적인 부분에만 주목하여 2차원적 표현이 주를 이었으나 르네상스에서는 사람중심으로 보는 이의 관점을 살려 입체적인 표현을 시도하였다. 
 
근세의 많은 작품은 피타고라스의 영향을 받아 우주, 질서 그리고 숫자와 연결 짓지 못하면 근세의 미를 이해하기 어렵다. 근세에 들어 규모와 콘셉트 또한 인간에게 맞추고자 인간의 육체적인 것뿐 아니라 정신적인 부분까지 연구하게 되면서 공간의 구조, 크기 그리고 디자인에 변화를 갖게 되었다. 다빈치는 자신의 이론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고대 로마 건축가 비투르비우스가 쓴 <건축 10서>를 인용했다. 신전 건축 시 건축에 적용되는 인체의 비례규칙을 적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근대의 건축 공간의 범위와 스케일의 변화가 생겼고 이것이 지금 건축계획의 기초가 되고 있다. 원래 로마는 비투르비우스의 건축 원리에 맞게 공간을 형성하고자 했으니 중세에 들어 건축물을 신의 스케일에 맞추다 보니 웅장함과 신비로움을 표현하게 되어 인간의 스케일이 제외된 것이다. 
 
다빈치가 균형, 조화 그리고 비례관계의 작품 경향을 보였다면 미켈란젤로는 그리스의 역동적인 신체의 조각 같은 면모를 보였다. 그의 그림은 르네상스에 들어서면서 그림 속에 날개와 후광이 사라졌고 '최후의 심판'은 이단의 그림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종교를 앞세운 십자군 전쟁 이후 많은 사람이 신앙심을 잃었고 에수의 구부정한 자세, 천사들의 힘겨운 모습등 미켈란젤로의 작품에 그 고뇌가 잘 드러나 있다. 르네상스를 통해 근세 전체에 왕족과 교회 귀족뿐 아니라 새로운 상인층이 사회적 역할로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르네상스가 무르익으면서 점차 르네상스 초기의 규율과 비례, 그리고 규칙적이고 사실적인 표현이 퇴색하면서 점차 근세만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왕족, 귀족 그리고 교황으로부터 점차 독립적인 상황으로 번지면서 규칙과 질서를 벗어나는 반항적인 인간의 특징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대표작으로는 미켈란젤로의 <피에타>가 있다. 

미켈란젤로 &amp;lt;피에타&amp;gt;, 틴토레토의 &amp;lt;최후의 만찬&amp;gt; , 파르미자니노 &amp;lt;목이 긴 성모&amp;gt;

이를 잇는 메너리즘의 대표작으로는 틴토레토의 <최후의 만찬>과 파르미자니노의 <목이 긴 성모> 등이 있으며, 진부한 내용, 색의 음침함, 비례의 파괴, 그리고 늘어진 형태 등이 매너리즘의 특징이다. 르네상스는 고전에 근거를 두고 있고 인간의 시점에서 새로 시작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어 질서와 비례 등 규칙이 있고 정확한 표현을 기본에 두고 있다. 매너리즘은 르네상스의 거장으로 불리는 다빈치와 미켈란젤로보다 더 뛰어난 표현을 하지 않고는 두각을 나타낼 수 없으며 또한 틀에 맞추어 표현한다는 반발심에서 시작되었다. 고전을 반발하고 마치 사춘기적인 행동을 보이면서 관심을 유도하는 것이다. 
 
르네상스를 문예부흥, 바로크와 로코코를 떠올리면서 화려함을 함께 꼽는 것이 일반적이나 근세에는 매너리즘이 아주 중요하다. 이 매너리즘을 통해 바로트와 로코코의 화려함을 이해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매너리즘 이후에 바로크, 로코코 등이 등장하지만 모두 매너리즘에서 파생된 것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매너리즘적인 양상을 벗어날 때 우리는 새로운 것이 등장했다고 말한다.               

베드로 성당의 평면 변화

 
일정한 스타일을 나타내기 보다는 절충적인 구성을 갖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매너리즘의 특징이다. 건축물의 외형을 다양한 형태로 나타내다 르네상스 말기 또는 매너리즘에 와서는 공간의 한계를 외부와의 연결로 눈을 돌리기 시작한다.
 
안드레아 팔라디오는 당대 누구보다 고전을 연구하여 이를 건축물에 적용한 건축가로 유럽 르네상스 말기와 매너리즘 건축물에 있어서 가장 영향력 있는 건축가 중 한 사람이다. 그리스 신전이 가진 절도와 절제의 미를 잘 나타낸다. 고대의 철학에서 모든 미는 우주와 숫자적인 관계를 갖는데 빌라 로툰다는 그것을 잘 반영하고 있다. 또한 빌라 로툰다의 중요한 의미는 공간의 해체이다. 이전의 건축물은 내부와 외부가 완벽하게 단절되었지만 빌라 로툰다는 외부의 영역을 내부로 끌고 들어와 내부와 외부를 연결시켰다. 대지, 계단, 전실 그리고 내부로, 그리스 신전에 사용되는 방식으로 단계별로 공간을 연결하였으며 그리하여 신을 대체하는 정원의 개념이 등장하게 된다. 빌라 로툰다를 르네상스 건축으로 간주해야 할지 매너리즘 건축으로 간주해야 할지의 논쟁은 불분명한 것으로 보이지만 종교적 건축에 적용되던 규칙을 주택에 적용했다는 점, 비례관계를 극한으로 끌어내 평면에까지 적용하고 내외부의 단절을 없앴다는 점에서 기존의 틀에 반항적인 매너리즘 건축으로 간주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프랑스의 왕권은 자연마저 다스리는 절대 권력을 추구했다. 그래서 왕궁 이외로 정렬된 형태의 정원이 설계되었다. 반면에 영국은 화가들의 풍경화에서 영감을 얻어 프랑스와 상반되는 성격의 풍경정원을 꾸미게 된다. 
 

바로크, 화려함과 혼란함

근세가 시작되며 상인 계급이 부흥하고 화려함이 등장한다. 르네상스가 시작되면서 고대의 철학과 학문이 자리를 잡게 되지만 이는 단순히 종교와 정치의 정체성을 위한 도구였다. 매너리즘이 시작되면서 탈고전주의가 등장하고 규범과 질서의 틀이 바뀌며 새로운 형태가 등장하는데 여기에는 상인들의 영향력이 지배적으로 작용했다. 이에 기존의 틀이 무너지고 르네상스보다 화려하고 혼란스러운 형태들이 등장하는데 이것이 바로 바로크이다. 
 
상인 계급은 후에 산업혁명과 시민혁명의 근거가 된다. 자신들의 위치를 인정받기 위해서는 기존의 사회 구조에 변화가 필요했다. 그래서 이들은 예술을 통해 정신적인 메시지를 곳곳에 담았다. 상인들은 기득권의 설득보다는 대중의 깨우침이 더 빠르다고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예술을 통한 교화에 힘썼으며 르네상스의 질서 있고 비례관계가 투철하며 명확한 구성과 분명한 전달의 틀을 벗어나는 혼란의 예술을 추구했다. 
 
다빈치가 확일화의 시작이라면 라파엘로는 이를 계승하는 역할이고 미켈란젤로는 이를 부수는 자였다. 이를 이어 바로크에서는 하나의 초점과 일방적인 방향이 아닌 빛이 분산하듯 무한함을 나타내려 하였고 고정된 점보다는 움직임을 보여주었으며 안정보다는 힘에 의한 파생을 나타내려고 했다. 
 
과거와 다르게 다양한 기능의 건축물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사회의 변화와 다양한 기능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크의 특징이다. 바로크 시대 그림의 특징 중 하나는 어떤 내용을 나타내려고 했는지 알 수 없을 만큼 다양한 구성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파올로 드 마에티스 <완벽한 자들의 승리> / 미켈란젤로 <최후의 심판>

 

◆바로크 화가 5인방

하루 5분 미술 상식이 쏙쏙 #8 바로크 거장 5인방을 알아볼까요? 바로크 미술은 17C 유럽 전역에 나타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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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에서는 자신의 개성을 살려 각자의 스타일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 일반적이어서 이 같은 일이 익숙한 우리에게는 동일한 구성을 표현한다는 것이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지만 과거에는 일반적으로 패트론(후원제도)이라는 특성 때문에 통일된 구성을 갖고 그림을 그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하여 바로크는 화가들의 예술과 자유가 조금 더 폭넓어졌음을 의미한다. 
 
살아있는 것은 꿈틀대고 어수선하다. 권력자들은 질서와 규칙을 원하지만 그렇지 않은 자들은 자신들이 살아있음을 나타내려고 했다. 무질서하고 역동적이며 다양성을 보여주기를 원하고, 각 개체의 존재가 인정받으며 그 개체들이 모여서 전체를 만들기를 원했다. 
 
권력만큼 부도 영향력이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그들이 가진 능력을 나타내다 보니 명확한 이미지보다는 화려함을 담게 되었다. 표현 속에 담긴 무질서함은 권력자로서의 불안감을 갖게 했다. 
 
루이 14세는 절대왕정을 꿈꿨고 바로크를 통재와 질서라는 규칙 속에서 이어가길 바랬다, 그래서 프랑스 바로크를 고전주의 바로크라고 부른다. 베르사유에 있는 거울의 방은 프랑스 고전주의 바로크 양식의 대표적인 장소이다. 로마의 화려함과는 동일하지만 질서 정연하고 규칙적이다. 
 
바로크는 매너리즘 후기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근대에 등장하는 아르누보는 과거의 것은 죽은 이미지이기 때문에 직선의 형태를 이루고 있다고 주장하며 곡선과 곡면을 내세웠다. 바로크 역시 직접적으로는 아니지만 건축물에 곡선이 많이 사용되었다. 피카소의 분석적 큐비즘에서 미래파 또한 아르누보처럼 역동적이고 다이내믹한 이미지를 보여주기 위하여 사선을 사용하는데 이 또한 바로크에서 출발했다고 볼 수 있다. 
 
바로크는 고전주의에서 시작한 근세의 르네상스에 대한 반발심이 새로운 개혁으로 등장하고 예술가들이 자유로운 체제에서 성장한 것이 아니라 일정한 교육의 틀과 시스템 안에서 성장하면서 국가가 원하는 형태로 발전되어 왔다. 각 시대의 특징은 곧 집권자의 입김이 많이 작용한 것이 사실이다. 정확하고 사실적인 표현으로 시작한 르네상스에 맞추어 변화를 해오다 시대적인 특징을 갖고 온 것이다. 바로크는 매너리즘에 나타난 비례의 파괴 대신 빛의 사용을 통하여 표현하기를 좋아했고 이전에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성스러운 대접을 받았던 것과 달리 바로크에 와서는 일반화되는 경향을 보이는데 이는 기독교의 위치가 그만큼 약화했음을 보여주는 반증이다.
 

로코코, 귀족과 부르주아의 시대

상인 계급은 점차 강해지며 부를 축적한 부르주아와 귀족의 시대가 열리게 된다. 국가가 식민지에서 가져온 원료와 무역에 의존하면서 경제 주체가 바뀌는데, 부르주아들은 무역을 통해 엄청난 부를 쌓게 된다. 중국으로부터 건너온 다양한 색감이 등장하고 덩어리의 장식이 아닌 섬세한 장식들이 유행하면서 본격적인 로코코의 시대가 열리게 된다.  
 
바로크가 대규모의 화려함을 보였다면 로코코는 일정한 무늬를 반복적으로 치장하는 방식을 취한다. 이전에는 왕족이 품위와 절제를 보였다면 로코코는 권력의 밖에서 자유분방한 귀족이나 부르주아가 오히려 사회의 만연한 쾌락이나 관능적인 모습을 충자하였다. 규모가 작은 장식품들의 출현은 절대왕정을 향한 귀족과 부르주아의 아부와 그들의 과시를 뜻한다고 볼 수도 있다.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 <그네> / 프랑수아 부셰 <퐁파두르 부인의 초상>

로코코에서 주목해야 할부분은 장식의 반복이다. 장식에 금속이 사용되며 대량생산이 가능해져 로코코 건축에는 같은 장식이 반복되는 특징을 찾아볼 수 있다. 디자인적인 요소가 건축물에서 가구로 옮겨 가며 더욱더 서민적인 흐름으로 변화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로코코는 산업형태가 서서히 수공업에서 팩토리 형태로 넘어가는 과도기를 보여주며 이 배경에는 상인의 역할이 컸다.

독일 포츠담 상수시 궁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궁전

신고전주의, 기득권 유지를 위함 몸부림

왕의 집권을 통한 지배세력의 권력이 막강하게 이어져 오면서 정신적인 허기와 인간의 소망을 채워줄 무언가를 갈망했고 이에 종교의 필요성이 다시금 피어나게 된다. 그러나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해소하는 도구로서 종교가 필요했던 것이지 전과 같이 집권세력과 동일한 선상에 종교가 자리 잡은 것은 아니다. 
 
고딕이 무너졌던 이유는 사실 고딕 자체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주변 상황의 실패에 대한 탈출구로 희생양이 필요했던 것이다. 신성 로마 제국이 생기면서 교황청이 갖고 있던 많은 영토까지 내놓은 상황에서 기독교의 입지는 갈수록 좁아지고 있었다. 왕권은 교황청의 세력을 늦출 수 있는 방법이 시대의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라 판단했다. 그러던 와중 인문학자들의 인본주의 주장은 고대의 질서와 규범을 필요로 했도, 그것은 자신들에게도 좋은 예가 되었기에 과거의 것을 지지한 것이다. 즉 고대의 신인동형은 교황청에도 속하면서 왕의 존귀함도 동반적으로 수반하는 것인데 이를 주장한 르네상스가 제1의 신고전주의이다. 그리고 이에 반발심을 갖는 매너리즘은 반고전주의의 노선을 타게 된다.
 
건축에서도 르네상스는 비례관계와 비율을 적용한 일정한 양식을 유지한 형태를 만든 반면 매너리즘에서는 다양한 양식의 조합을 마치 여러 가지 요소를 박스에 넣어 흔들어 놓은 듯한 절충적인 이미지를 주었다. 그러고 바로크에 와서는 비정형의 이미지가 정형을 덮어버리듯, 역동성과 활력의 형태로 변모했다. 이렇게 디자인의 변화는 사회의 요구로 시작된다. 
 
존재가 약해진다는 의미는 권력뿐 아니라 경제적인 요소가 강력한 무기로 등장하면서 시대의 변화를 만드는 원인이 된다. 일정한 영토에서 봉건주의는 권력의 강력한 무기였지만 식민지 영역 등 영토가 확장되면서 권력 밖에서도 부의 축적이 가능해지자 사회는 왕족, 종교 지도자, 귀족 그리고 부르주아라는 새로운 형태로 구성되었다. 
 
더욱이 미국이 독립하면서 시민들의 의식에 민주와 자우라는 새로운 기운이 돌기 시작하고 17세기와 18세기에 걸쳐 일기 시작한 시민 지적 운동인 계몽주의가 유럽을 휩쓸면서 시민들 사이에는 새로운 사회에 대한 욕구가 꿈틀대기 시작했다. 
 
강력했던 태양왕 루이 14세가 죽은 후 강력한 중앙집권이 무너지면서 귀족들은 점차 타락해 갔고 귀족과 부르주아가 주체로 떠올랐던 로코코의 문화는 프랑스에서 날로 확산해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영국에서는 윌리엄 해밀턴의 폼페이 발굴에 대한 책이 등장하면서 고대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일기 시작한다. 이 관심이 확장되면서 유럽 귀족 집안의 젊은이들이 장기간 이탈리아를 방문하여 고대를 배우는 '그랜드 투어'라는 과정이 유행처럼 번지게 된다. 이것이 새로운 신고전주의의 도화선이 된다.
 
고대가 집권층에게 매혹적인 이류는 바로 규범과 규칙이 담겨 있기 때문인데 귀족과 부르주아가 이끄는 로코코 이후 점차 개방적이고 퇴폐적으로 흐르는 문화를 통제할 필요를 느꼈던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진행되는 상황에서도 이전 시대와 크게 다른 점이 있다면 시민의 지식화와 부르주아의 등장이다. 
 
시민의 계몽주의는 부르주아를 바탕으로 기득권을 압박하기 시작한다. 근세에 등장한 신고전주의는 르네상스의 신고전주의와는 대상이 달랐다. 근세의 집권층은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목적으로 고전을 다시 가져왔다. 
 
파리에 있는 판테온과 나폴레옹 개선문은 상징적인 의미와 함께 고대의 영웅을 통해 집권자에 대한 존경심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는 신고전주의의 출발을 알린다. 

3| 근대, 제2의 건축 형태

아르누보

근대는 탈 과거를 모티브로 삼았다. 산업혁명이 일어나면서 대량생산에 따른 현상이 사회에 등장하기 시작한다. 자본주의가 새롭게 등장하는데 이 시기에 걸맞은 공장, 창고, 오피스, 백화점 등 새로운 건축물들이 나타난다. 이 건축물들은 건축주의 의견에 의존하기보다는 기능에 더욱 초점을 맞춘 것이었다. 
 
자본주의와 함께 후원제도가 붕괴되고 시민혁명과 함께 무너진 기득권의 붕괴로 각 분야의 예술가들은 홀로서기를 해야 했으며 진보적인 양식주의자들은 독자적인 양식을 추구하게 되었다. 근대에 건축가가 독립된 영역의 전문가로 들어서면서 고유의 영역에 대한 긍지를 갖고 비로소 자신만의 재능과 개성을 표현하기 시작한다.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며 유럽은 새로운 시대를 열고자 근대의 차이를 과거와 두고 탈 과거 운동을 시작한 반면 독립적인 역사를 만들어가는 미국으로서는 정통성에 대한 역사 만들기에 힘을 쏟으며 과거의 연속성을 만들고자 오히려 신고전주의에 열을 올리게 된다. 특히 미국의 독립은 유럽국가에 자유를 일깨우는 새로운 계기가 되어 프랑스혁명에 박차를 가하면서 나폴레옹 3세 이후 공화국이 설립되고 민주주의에 대한 발판을 만들게 된다. 
 
근데에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는 즈음에 루소의 낭만주의가 등장하는데, 이것은 오히려 근대를 반대하는 부정적인 태도를 지녔으며,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이론가들의 주장이 거세지면서 건축 또한 부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이런 과도기적인 상황 속에서 일반 대중과 예술가들의 불일치로 예술은 변화된 사회를 거부하고 일반 대중은 근대정신에 예술이 동참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예술가들을 무시하고 경멸하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다. 
 
근세 말 신고전주의 시대에는 그 시대를 대표할 만한 건축가들이 없는데 이는 과거의 양식을 쫓으며 새로운 양식이 오히려 건축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사회적인 인식 때문에 새로운 것을 시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산업혁명을 통해 철과 유리가 건축의 주재료가 되며 영국 박람회를 위해 만들어진 수정궁이 판도를 바꾸게 된다. 
 
과거의 산물이었던 장식을 배제하고 새로운 구조와 형태를 시도하려 했던 아르누보는 권위적이고 자율적이지 못한 아트는 죽은 것이라 생각했는데, 과거는 주로 직선으로 이뤄진 것이기 때문에 자율적이며 생명력 있는 것은 꿈틀대는 형태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여 곡선이나 곡면을 주로 표현했다. 
 
새로운 것에 목말라했던 유럽에 일본의 양식이 인기를 끌게 된다. 일본 우키요 미술에 있는 대각성, 비대칭 그리고 원근감적인 표형과 자연의 모습에서 따온 대각선 구도와 비대칭의 자포니즘은 유럽의 예술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건축 및 예술운동에 꽃과 식물의 부드러운 곡선을 기초로 한 과거와는 차별화된 생명력과 생동감이라는 새로운 미학적 접근 방식을 받아들이게 된다. 
 
아르누보는 기술의 발전으로 철의 주물이 가능해짐과 동시에 탈과거를 추구하던 사회적 요인이 겹쳐져 전 유럽에서 동시대적으로 일어난 현상이다. 아르누보는 여러 나라에서 각자 고유의 이름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유럽 여러 국가에 동시에 출현했음을 의미한다. 아르누보가 신예술이라는 이름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과거의 형태들이 직선으로 만들어진 것과 비교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곡선으로 된 형태들의 원조는 아르누보 양식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가우디가 아르누보의 대표적인 건축가로 각광받는 데는 그의 자연 사랑이 큰 몫을 했다. 근대가 시작될 즈음 루소의 자연으로 돌아가자는 낭만주의 영향이 작품에서 나타나는데 사그라다 파밀리아의 쌍곡선과 그의 자연과 인간의 공간을 연결하는 유기적인 흐름은 실로 근대의 강력한 기능주의를 꼬집는 것으로, 이는 당시 러스킨과 윌리엄 모리그의 기술과 예술의 란치를 원하는 기술공예운동에 동의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강력한 주장이다. 그는 건축물 자체도 하나의 자연에 속한 개체로 인식되기를 원했다. 이것이 아르누보의 정신을 완성하는 결정체로 그의 작품을 설명하는 중요한 부분이다. 그의 건축물은 장식 그 자체를 부정하였으며 오히려 건축물을 자연의 장식으로 여겼다. 
 

20세기

로마가 멸망하고 프랑크 제국이 들어서며 유럽은 후에 동프랑크, 서프랑크 그리고 중프랑크 세 개의 형태로 분리되지만 국가 간의 경쟁 구도가 성립될 즈음 신성 로마 제국의 통일로 유럽은 다시 하나가 된다. 물론 오스만 제국 등 주변 국가가 있었지만 유럽의 패권은 선진국 형으로 이미 기술적인 진보를 이루고 있었으므로 주변 국가에서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거나 큰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큰 변화 중 하나는 오스만이 비잔틴을 침공한 1400년도 중반에 이미 총기류가 등장하면서 기사라는 특권층이 사라지며 무기의 선진화가 국가권력의 하나로 자리 잡아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봉건제도는 아직 진행 중이었고 왕권과 신권의 두 바퀴가 유럽을 지배하고 있었다.
 
근세에 들어서면서 기독교 국가 체제에 변화가 생기고 인문학의 등장과 과학의 발달, 특히 인쇄술의 발달로 문자가 보급되면서 라틴어를 통하여 지배계층이 하나로 묶여 있었던 과거와는 달리 신성 로마 제국의 약화와 함께 언어를 중심으로 국가가 형성되면서 자체적인 독립국가의 성장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렇게 유럽은 오랜 기간 하나의 역사 속에서 묶여 있다가 점차 자신들만의 역사를 갖게 되지만 사실은 이것이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던 것이다.
 
근세에 들어 각 강국이 성장하며 세계는 새로운 판도를 맞이하게 되지만 아직은 교통이 발달하지 않은 시대였기 때문에 바다를 가진 나라가 영토 확장에 유리한 위치에 놓이면서 영국, 스페인, 포르투갈 같은 나라들이 우세한 상황이었다. 프랑스는 100년 전쟁의 여파로 안정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었지만 곧 빠른 속도로 옛 영광을 되찾고 열강의 대열에 합류한다. 
 
새롭게 짜인 유럽의 패권은 과거와 같이 전재을 하기보다 해상을 통해 유럽 외의 지역을 탐험하기 시작했으며 이를 통해 많은 식민지를 확보하게 된다. 이렇게 바다에서 승리한 국가가 강국으로 살아남으며 영국과 프랑스는 강국의 축으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또한, 식민지에서 들여온 원료는 자국의 이익과 산업에 큰 도움이 되었으므로 이를 활용하는 방법을 모색하게 된다. 그러나 프랑스는 루이 14세부터 재정난에 허덕이고 있었고, 각 분야의 중축을 맞고 이었던 개신교 신자 위그노를 추방하면서 유럽에서 강국의 자리를 위협받기도 한다. 하지만 나폴레옹의 등장으로 프랑스는 다시 유럽 강국의 자리에 서게 된다.
 
프랑스는 안정화를 이루면서 영국보다 더 먼저 박람회를 시작할 정도로 산업혁명에 박차를 가하기도 했다. 위그노가 추방되고 산업혁명에 뒤처지는 상황에서 영국의 직물을 대량생간하기 위해 산업화를 급속도로 진행하면서 강국의 자리를 확고히 하고 있었다. 그러나 영국의 미국 식민지 침략으로 프랑스의 루이 16 세는 미국을 지원하게 되면서 더 많은 빚을 지게 된다. 나폴레옹이 프랑스에서 영웅으로 남게 된 이유가 바로 프랑스를 안정화시키고 다시 유럽의 강국으로 올려놓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유럽이 산업화의 소용돌이를 겪고 있을 때 영국과 프랑스는 경제 강국의 위치를 지키게 된다. 그러나 독일과 미국이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두 나라는 경제대국으로서의 위치를 위협받게 되는데 다른 나라와는 달리 독일은 국가 경제를 자유로운 틀 속에서 성장시키지 않고 국가 체제 안에서 관리하는 형태로 성장을 유도한다. 특히 공급과잉이라는 자본주의의 생태적 한계를 이겨내기 위한 독일의 해결책이었던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은 전 세계의 판도를 바꾸어 놓는다. 미국은 중립국으로 유럽의 전쟁에 관여하지 않았지만 독일에 의한 미국상선의 공격으로 인해 유럽의 전쟁에 참여하게 되고 전쟁 후 유럽은 미국과 러시아로부터 경제적인 영향을 받게 된다. 
 
그 이후에 러시아에서 최초로 노동자 혁명이 일어나고 레닌 사상에 이목이 집중되면서 세계는 정치적으로 분리되기 시작한다. 20세기는 이념 간에 분쟁이 일어나고 모든 분야가 급속도로 변화하는 시기였다. 정치적인 변화뿐 아니라 정신적인 독립도 생기면서 탈 과거에 대한 욕구는 한층 강해졌다. 러시아에서 노동자 혁명 후 많은 예술가가 노동자 일깨우기 운동을 전개하는데 이 시기에 등장한 예술들이 20세기 예술의 큰 틀이 되었으면 근대뿐 아니라 현대까지 이어 오고 있다.
 
과거의 신분제도는 귀족과 평민이라는 수직적인 관계였으나 이제 노동자와 자본가라는 수평적인 관계로 바뀌게 된다. 이렇게 자본주의의 시작으로 건축가의 입지도 달라졌으며 한 분야의 전문가로서 인정받는 시대가 다가온다. 유럽 사회에도 공화국이 도래하면서 계급 간의 타협보다는 민족 간의 타협에 관심을 갖게 된다.
 
러시아 혁명을 통하여 예수은 말레비치와 리스즈키 합리주의, 빅토르와 베스닌 형제의 구성주의 두 갈래로 선정된다. 이러한 두 개의 사조가 발생한 이유에는 근대가 시작되면서 탈과거와 새로운 재료에 대한 적응으로 인하여 건축가보다는 기술자가 조명받는 현상이 일어나고 대량생산에 의한 상품의 질이 떨어지면서 예술적인 방향의 필요성이 부각되었기 때문이다. 20세기 초는 이렇게 새로운 이념을 정착시키는 운동이 일어나고, 과거로부터 완전한 형태 탈피를 모색하려는 움직임이 일기 시작한 시기다. 
 
합리주의는 새로운 재료와 구조 그리고 기술에 대한 분석을 필요로 하며 이를 디자인에 정착시키려는 사조이고 구성주의는 반 전통적인 특징이 강하며 순수한 형태의 기능적 조합에 따라 형태의 분리를 주장하는 사조이다. 즉 형태 안에 존재하는 가장 순수한 사각형과 원의 조합으로 형태를 단순화시키는 작업을 말한다.
 
대중교통의 변화와 함께 빌딩에 전기, 엘리베이터 같은 여러 편리한 시설이 도입되었고, 다양한 실험을 시도하는 예술활동이 등장했다. 이 시기에 다다이즘이 등장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돌아온 고향은 실망 그 자체였다. 이들은 과거의 예술 형식과 가치를 부정하고 허무함을 외치며 그들의 양식에 대한 이름조차 붙이기를 거부했다.
 
근대의 성격과 현대 건축의 기초를 이루게 된 것은 합리주의와 구성주의가 등장하면서부터였다. 이는 과거의 형태들이 하나의 틀 안에 전체 공간을 포함하고 있었다면 이 두 사조의 원리가 등장하면서 명확한 탈 과거의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이렇게 미술 분야에서 먼저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미술이 2차원이라는 표현 방법에 있어서 3차원의 건축보다 더 실험적인 시도가 용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합리주의와 구성주의

합리주의는 절대주의라고 부르기도 한다. 하나의 사물을 온전하게 분석하여 마지막까지 얻을 수 있는 최소한의 요소, 즉 더 이상 분해할 수 없는 형태 요소를 나타내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더 이상 분해할 수 없는 형태를 삼각형, 사각형 그리고 원으로 생각했다. 이 기본적인 형태의 이해 없이 이루어진 복합적인 형태는 이해하기 불가능한 것으로 보았다. 
 
과거 건축물의 특징이 전체 형태에 다양한 공간들이 박스 안 물건처럼 담겨 있었다면 구성주의에 와서는 그 박스를 풀어헤친 것이라고 보면 된다. 즉, 각 기능은 각 형태를 갖는 것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구성주의는 과거의 통합적인 형태 모임에 극적으로 반대하는 입장으로 기능적인 형태 구성을 중요한 포인트로 삼고 있다. 기능에 초점을 맞추어서 형태의 다양성 등 각 공간에 대한 독립성을 보여주고자 한 것이다. 
 
이렇게 합리주의와 구성주의는 근대와 현대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는데 그것은 과거의 표현과 성격이 완전히 다른 것이다. 근대 초기에는 탈 과거적인 방향으로 흐르기도 했지만, 완전히 분리되지 못한 상황이었다. 이에 이들의 순수형태에서의 출발은 입체파뿐 아니라 국제양식의 방향을 제시하고 기능적인 형태가 무엇인지 알게 해 주었으며, 이루 근대가 자체적인 양식을 갖지 못한 방황에 종지부를 찍는 역할을 했다.
 

입체파

과거 미술의 표현 방법이 실제적인 시각적 표현에 국한되었다면 20세기 예술은 정신적인 표현으로 보이는 것을 믿지 않고 그 본질을 나타내려 한 것이다. 이는 새로운 시작을 갈망한 데서 비롯되었다. 입체파는 합리주의로서 피카소는 "나는 보는 것을 그리는 것이 아니고 생각하는 것을 그린다"라고 했고, 현대 건축가 피터 아이젠만은 "건축은 표준성에 흡수되지 않고 저항하는 것이다. 흡수에 대한 저항이 바로 현재성이다"라고 했다. 또 그는 "지나치게 새로운 것만큼 위험한 것도 없다. 그만큼 빨리 구식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아방가르드를 잘 표현하는 말이다. 
 
한 예술가가 자신의 관점에 자신의 철학을 담아 작품에 얼마나 잘 표현했으며 이를 통하여 우리가 새로운 관점을 갖는 데 도움이 되거나 일조를 했는지, 이로 인하여 예술사에 어떤 발자취를 남겼는지에 그 진정한 평가가 있는 것이다. 어느 분야에나 실력이 출중한 사람들이 있지만 그렇다고 모두 유명한 것은 아니다. 실력이라는 것은 노력한 결과이지 그 실력이 인류의 역사에 족적을 남길 만한 작품을 내놓지 못한다면 그저 전문가로 남을 뿐이다. 
 
추상미술의 원조는 폴 세잔과 피카소이다. 세잔이 2차원이라면 피카소는 3차원의 입체파를 발전시켰다. 이들로 인해 종합적 큐비즘과 분석적 큐비즘이 등장하고, 여기서 파생된 것이 데 스틸과 미래파이다.
 
세잔은 사물의 본질은 어느 방향에서 보는가에 다라 다르게 인식될 수 있음을 말하고자 했다. 피카소는 하나의 사물을 여러 방향에서 바라본 각각의 그림을 조합하여 3차원적 사물(큐빅)을 표현했다. 재구성은 완벽한 자유에서 재탄생되어야 한다. 원형과 동일한 모습을 보여야 하는 것 자체가 구속이라고 생각했다. 하나의 사물에서 얻은 요소들은 그 형태가 가진 원자와 같은 것이고 그 원자를 어떻게 구성하는가에 따라 새로운 형태로 재탄생시킬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분석적 큐비즘은 분석을 통하여 원형으로 돌아가기는 어렵지만 새로운 형태를 재창조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했다. 종합적 큐비즘은 원형에서 나온 각 요소에 대한 존재의 중요성을 부각해 이 각 요소가 모여야 종합적인 형태가 만들어지는데 초점을 두었지만 분석적 큐비즘에서 각 요소의 존재는 중요하지 않다. 단지 전체적인 형태를 구성하는 각 요소가 필요할 뿐 각 요소 하나하나가 갖는 의미는 무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새롭게 구성된 전체적인 형태를 더 중요하다고 여겼다. 피카소는 이렇게 전체는 곧 부분의 조합이라는 의미를 전달하려 했다.
 

종합적 큐비즘: 피카소의 &lt;마리테레즈의 초상&gt; / 몬드리안 작품
분석적 큐비즘: 피카소의 &lt;바이올린을 든 남자&gt; / 미래파적인 디자인

미래파

구성주의는 과거와 명확한 차이를 보이는데 여기에는 아방가르드가 있다. 러시아 구성주의는 말레비치와 엘 리시츠키의 이론으로 시작했고 미의 기준은 속도였다. 이들은 미래로 나가기 위한 자동차, 기차역 등의 동적인 요소를 최고의 가치로 여겼다. 과거는 부정적으로 여기며 차도와 인도의 구분을 통한 자동차의 속도를 주장했다. 구성주의는 근대의 명확하고 본격적인 시작을 나타낸다.

- 우리는 힘과 위험에 대한 사랑을 노래하겠다. 이 같은 사랑은 대담무쌍함의 습성이다.
- 지금까지 문학은 황홀경, 수면, 고요한 생각만을 찬양했다. 우리는 공격적인 행동, 열에 들뜬 불면증, 경주자의 활보, 목숨을 건 도약, 주먹으로 치기와 손바닥으로 따귀 때리기를 찬양하고자 한다.- 우리는 새로운 아름다움, 다시 말해 속도의 아름다움 때문에 세상이 더욱 멋있게 변했다고 확언한다. 폭발하듯 숨을 내쉬는 뱀 같은 파이프로 덮개를 장식한 경주용 자동차—포탄 위에라도 올라탄 듯 으르렁거리는 자동차는 <사모트라케의 니케>보다 아름답다.
- 싸움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없다. 공격성이 없는 작품은 걸작이 될 수 없다. 시는 미지의 힘들을 인간 앞에 항복하도록 만드는 폭력적 타격이다.
- 우리는 세상에서 유일한 위생학인 전쟁과 군국주의, 애국심과 자유를 가져오는 이들의 파괴적 몸짓, 목숨을 바칠 가치가 있는 아름다운 이념, 그리고 여성에 대한 조롱을 찬미한다.
- 우리는 박물관, 도서관, 모든 종류의 아카데미를 파괴하고, 도덕주의, 페미니즘, 모든 기회주의적이고 실용주의적인 비겁함에 맞서 싸울 것이다.

  필리포 토 마소 마리 네티 <미래 지향적 선언문>

21세기는 속도에 더욱 민감한 시기로 미래파의 콘셉트와도 맞아떨어지는 부분이 있어 지금을 신 미래파라고 부르기도 한다. 

안토니오 산텔리아 &amp;lt;라 치타 누오바&amp;gt;

데 스틸

프랑스의 시민혁명 이전에 있었던 이성을 앞세운 계몽주의와 과거 로마나 그리스의 정통성을 다시 갖고자 했던 신 고전주의가 주를 이루던 시기가 막을 내릴 즈음 낭만주의가 등장했다. 낭만주의는 이성과 합리주의 그리고 과거의 권력과 종교에서 오는 형식을 중요시하는 절대주의에 반하는 성격으로, 형식을 탈피하고 개인의 자유로운 개성이나 감정을 더 중시하는 문화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등장한 것이 데 스틸이다. 이들은 수직과 수평에 의하여 자유롭게 만들어지는 새로운 구성을 선보이고자 했다. 
 
몬드리안이 추구하는 영적인 콘셉트는 미니멀리즘에서 보여주는 '간결한 것이 더 아름답다'와 일치하거나 다다이즘에서 말하는 고정관념 타파의 방법으로, 추상적인 이미지를 통하여 관찰자와 더 많은 것을 나누려는 의도이다. 
 

표현주의

산업혁명 이후 물질적 공급에 의해 물질에 대한 욕구가 해소되면서 사고에 대한 발달도 더 다양해지고 있었는데 계몽주의에서 낭만주의로, 그리고 니체의 개인주의로 사회는 변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군국주의에 대한 실망과 정신적인 혼란으로 자신이 보고 믿고 따랐던 것이 실체가 아닐 수도 있다는 의심에 생겨난 것이 다다이즘이다. 그런데 다다이즘 이전에 이런 분위기를 조성하는 운동이 있었는데 이것이 바로 표현주의이다. 기독교와 군국주의에 부정적인 반응으로 니체의 철학이 틈을 메우고 있었다. 
 
표현주의는 사물을 실질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관찰자의 의도를 담아 색채, 구도를 변경하고 대상을 과장하거나 생략하는 등 의도적인 개인의 의견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여긴 것이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뭉크의 <절규>이다. 

 

건축에서는 일반적으로 건축의 공간을 기능에 맞추어 설계했던 반면 표현주의는 인간의 내면을 형태에 담으려 했다. 이는 형태 시도에 대한 새로운 발걸음을 한 걸음 더 내딛는 것으로 현대 건축의 형태에 대한 시작을 알리는 것과 같으며, 이전의 고정된 건축물 형태를 추상적으로 다양학하게 시도할 수 있음을 나타내는 메시지 이기도 하다.

독일 칠레하우스 / 아인슈타인 타워

아르데코

근대정신 중 하나는 바로 탈 과거로 그 기준을 장식의 사용에 두었다. 즉 장식을 건축물에 적용하는 것은 곧 과거와 연결시킨 것으로 근대정신에 어긋난 것으로 여긴 것이다. 그래서 루스는 장식을 사용하는 것은 반 근대적인 정신의 산물이라고 했다.

 

근대 초기에는 형태주의와 기능주의의 대립이었다. 즉 이전에는 형태주의가 주였고 아방가르드 등장 이전에는 이 두 가지가 변행 하던 시기였으며 그 이후는 기능주의가 주를 이루었다.

 

아돌프 로스는 장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과거의 건축가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무장식 건축물이 기능에 전혀 문제가 없음을 알리려 노력했다. 그러나 예술가들은 무장식의 표현을 질 낮은 제품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예술과 기술을 접목시키는 아트 & 크래프트 운동을 일으켰다. 

 

아르데코의 옹호자인 디자이너 폴 폴로는 "사람이 살아가는 데 반드시 필요한 것만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 꽃, 음악, 향수 등이 삶 속에서 필요한 이유 따위는 없다."라며 기능주의만을 주장하는 모더니스트들에 반박했다.

 

아르데코는 프랑스에서 시작됐지만 미국이 역사 만들기에 정성을 쏟던 당시 모던의 기능주의보다는 역사적인 이미지를 가진 아르데코가 미국 문화에 더 적절하다고 판단한 것인지 오히며 미국에서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1929년 대공황이 오면서 모던을 추구하는 현대 예술가 협회의 주장이 더 강렬해지고 가구 회사 들과 개인을 위한 제품 생산보다는 시리즈 같은 기획물로 돌아서기 시작하면서 아르데코는 더 이상 확장되지 못했다. 

 

유럽에 아르데코가 등장한 것은 근대가 시작한 후인 1900년도로 장식에 대한 거부감으로 인해 많은 질타를 받고 급기야 국제양식에 밀려난 반면 미국은 오히려 1930년대 이후 활성화되었다. 이는 역사 만들기를 바탕에 둔 것이기도 했지만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 경제대국으로 급부상한 이유도 한몫했다. 아르데코는 역사적인 의미도 있지만 부의 상징을 부각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기 때문에 대형 빌딩에 유난히 많이 적용했다.

크라이슬러 빙딜 / 아르 데코 가구 / 평면 디자인

4| 현대, 해로운 시대를 기대하다

모더니스트들은 오로지 귀족을 위하여 만들어진 장식은 일반인들에게 동력을 더욱 요구하는 일이었으며 이는 일부 계층만을 위한 작업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장식들은 오로지 시각적인 역할만 담당했을 뿐 기능적인 부분에서는 쓸데없는 요소로서 모든 사물은 기능을 우선시해야 한다는 새로운 모토 아래 새로운 시대를 열어간 것이다.


새로운 희망 속에 모던은 승승장구하여 심지어 구조적으로 자신감을 갖고 과감한 시도도 서슴지 않았으며 역사적인 형태를 음지로 몰아내고 새로운 시대를 마음껏 즐기던 끝에 레이트모던까지 등장시키는 데 일조한다. 이렇게 역사주의를 시대에 뒤떨어진 디자인으로 간주하며 전진했고 특히 국제주의 양식의 등장은 일정 지역뿐 아니라 전 세계를 하나로 묶고 고리타분한 역사에 매달린 사람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지역과 환경 그리고 문화까지 무시한 방법으로 보란 듯 도시를 채우며 성장한 것은 실로 모던의 큰 승리였다.

 

사실 오랜 역사 속에서 도시를 채우던 역사주의 건축물을 제치고 모던의 건축물들이 도시의 자리를 차지하는 기회를 얻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전쟁을 통하여 도시의 많은 건축물, 특히 과거의 건축물들이 사라지면서 이는 모던에게 주어진 절호의 찬스였던 것이다. 만일 전쟁으로 인해 도시사 폐허로 변하는 상황이 발생하지 않았다면 아무리 기술과 재료가 과거와 달랐어도 모던도 이렇게 빠른 속도로 성장할 수 없었을 것이다. 

 

모던은 이것을 기회라고 생각하여 양식을 무시한 디자인 국제주의 양식으로 '형태는 기능을 따른다'는 모토 아래 장식을 철저히 배제하며 도시를 가득 채워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프루이트 아이고의 철거 사건 후 모던은 사망일을 선고받은 듯 충격에 빠졌다. 이때 모든 것의 해결책처럼 자리매김하며 질주하던 모던의 행보가 잠시 멈추었다. 

 

그 틈을 타서 모던은 재평가를 받게 되고 많은 모던 건축가들이 모던의 문제점에 동의하며 역사주의 건축물의 필요성에 동참하게 되면서 벤투리의 '더 적은 것은 지루한 것이다'라는 주장이 설득력 있게 작용하고 도시는 다양한 건축물의 등장을 허용하게 된다. '기능은 형태를  따른다'는 역사주의 모토가 다시 등장하게 된 것이다. 역사주의 건축물은 감성주의를 바탕으로 인간의 심성을 중요시한다. 그러나 모던은 이성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것으로 기술적인 부분을 부각한다.

 

포스트모던이 재등장하고 다시 장식에 대한 관심이 쏟아지면서 모더니스트들은 이에 대항할 양식의 필요성을 다시 느낀다. 그리고 벤투리나 필립 존슨의 장식에 대한 의견에도 관심을 갖게 된다. 그러나 모더니스트들이 시도하는 새로운 모던은 장식을 첨가했지만 그것이 역사적인 장식은 결코 아니었다. 그렇게 탄생한 네오모더니즘은 형태적인 장식일 뿐이었다. 즉 형태 그 자체가 장식이 되는 것이었다.

국제양식

건축물에는 이전의 양식이 절충되어 등장하고 특히 대칭이라는 전체적인 형태의 범주는 아직도 실현되고 있었기 때문에 근대 초기는 양식적인 과도기였다. 그러나 입체파가 등장하고 절대주의, 그리고 엘 리시츠키의 프라운 연작 등은 이전의 이미지와는 분명히 달랐고 근대 초기의 이미지와도 차별성을 나타냈다. 이것은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지만 아르데코의 등장은 근세 말미에 신고전주의가 등장하여 과거로 되돌아가는 느낌을 주었다. 아르데코와 근대 건축은 이렇게 마지막 싸움을 하게 된다. 

 

이전의 건축물은 대부분 상류층의 건축물이었던 반면 일반인들을 겨냥한 건축물의 등장은 역사에서 찾아보기 힘들었다.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이 죽은 대전으로 전쟁 후 폐허가 된 전 세계의 도시에 많은 건축물 중에서도 특히 주택의 보급이 시급해졌다. 그러나 과거 건축 양식의 형태는 이 상황에 맞지 않았고 새로운 주택을 보급하기 위한 건축술이 필요했다. 이때 증장한 것이 국제양식으로 이는 특히 전쟁의 한가운데 있었던 네덜란드, 프랑스, 그리고 독일에서 시작되어 1970년대까지 급속도로 전 세계에 퍼져 나가 지배적인 건축양식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1927년 국제양식의 가장 획기적인 표현으로 건축된 슈투트가르트의 바이센호프 주거단지는 규칙을 적용한 건축물로 당시에는 실로 획기적이었다. 

 

고대 양식이 형태주의와 감성 위주였다면 근대 양식은 기능주의와 이성이 주를 이뤘다. 또한 건축물의 형태 면에서 고대가 하나의 테두리 안에 모든 공간을 집약했다면 근대로 오면서 공간은 기능별로 독립되는 구조를 띠게 됐다. 특히 산업혁명과 시민혁명을 거치며 삶의 형태와 신분 체계가 수평적으로 바뀌면서 사람들의 생활 형태에도 변화의 바람이 일었다. 

 

산업혁명의 영향은 실로 컸으며 이를 사회에 적극적으로 사용하려는 운동이 한창이었는데 건축가 르코르뷔지에는 테일러주의를 건축에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이를 적용하고자 했다. 과학적 관리는 위크플로를 분석하고 종합하는 경영 이론으로 주요 목표는 경제 효율성, 특히 노동 생산성을 향상하는 것이다. 

 

국제양식의 디자인 특징 중 하나는 위치, 장소 및 기후에 무관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국제양식이 어디서나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것으로 인식되는 발찬이 되었다. 지역 역사 또는 국가적 언어를 반영하지 않는 객관적인 스타일로 발전된 것이다. 

미니멀리즘

예술작품을 감상하면서 예술과와 관찰자의 교감 사이에 무한한 상상력이 발휘될 때 우리는 감동받고 깨달음을 얻게 되기도 한다. 예술가가 자신이 느낀 감동을 작품을 통해 표현하고 전달하는 데 있어서 작품에 자신의 감동을 구체적으로 표현한다면 정신적인 교류보다는 동의하는 차원에서 끝날지도 모른다. 반대로 예술가의 의도를 정확하게 알 수 없을 때 관찰자는 그 의도를 추측하게 되고 이 부분에서 다양한 해석이 나타난다. 

 

추상 작품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하나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시각적으로 보여주어 그것을 상상하게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형태에 대한 최소한의 요소로 전체를 상상하게 하는 것이다. 후자가 바로 미니멀리즘이다. 

 

말레비치는 당시 주입식 사회 분위기로 정치에 현혹되는 국민들을 깨우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또는 반항적으로 이러한 시도를 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미니멀리즘적인 양식을 추구하는 건축가는 많아지고 있는데 이는 점차 단순해지는 시재적인 성향도 있지만 이제는 공간이 갖추어야 하는 기능의 많은 부분을 설비 등으로 해결할 수 있기 때문에 형태에 부수적인 부분이 많이 사라지고 있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레이트 모던

모던이 시작된 배경에는 산업혁명도 있지만 시민혁명이라는 시대적 변화도 큰 역할을 했다. 특히 군주제가 무너지고 공화제가 들어서면서 신분제도의 변화와 함께 지원제도의 붕괴로 예술가들의 홀로서기가 새로운 작품의 물결에 힘을 실었다. 이전까지는 작품을 원하는 사람들의 취향에 맞게 작업을 하던 방식에서 이제는 자기만의 스타일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근세의 마지막인 신고전주의에서 과거의 그리스와 로마 양식이 재등장하면서 과거로 돌아가는 듯했지만 산업혁명이 몰고 온 새로운 건축물의 요구는 이전의 건축 형태로 해결할 수가 없었으며 특히 유리나 강철의 등장흔 건축 구조에 변화를 일으켰다. 

 

모던은 빠른 변화를 추구하였지만 과거를 과감히 버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과거의 형태를 곳곳에서 이어오게 했다. 예를 들어 가우디는 아르누보의 대표적인 건축가이지만 고딕의 이미지를 갖고 있었고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도 모던의 중요한 영향을 미친 건축가지만 과거의 이미지를 쉽게 버리지 못했으며, 사실상 글래스고도 모던하지만 그 이전의 대칭이나 비율적인 면에서 과거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이에 아돌프 로스 같은 건축가의 등장으로 모던은 새로운 시대에 더불어 고유의 양식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과 함께 성숙기에 접어들고서야 비례, 대칭, 그리고 다양한 재료를 선보이는 현대라는 시대에 맞는 건축 형태를 선보이기 시작했다. 점차 발달한 모던은 급기야 자심감에 차 혁신적인 형태를 만들어 내는데 그것은 바로 구조에 대한 자신감이었다. 

 

레이트 모던의 해체주의는 과거 건축이 규칙과 틀, 그리고 단아한 모습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비웃기라도 하듯 과감한 시도를 한다. 레이트 모던 양식의 조형물은 하중의 흐름이 강렬하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불규칙한 형태들의 조합과 수평과 수직의 불일치를 통해 불안감을 조성한다.

리처드 세라 / 데이비드 스미스 / 앤서니 카로

포스트 모더니즘

세인트루이스의 프루이트 아이고 주택단지 사고와 함께 숨 죽어 있던 과거 양식은 되살아 난다. 단지 기능주의적인 건축물로 승승장구하던 모던이 사망했음을 뜻하며, 국제양식을 앞세워 모던의 문제를 지적한 것이다. 이후 과거 양식이 재등장하는데 이것이 바로 포스트 모더니즘이다.

그림이나 음악은 시대적인 변화 속에서 감성적인 부분과 이성적인 부분이 공존하며 만든 자와 제공자 사이에 언어적인 공유가 가능했으나 건축은 감성적인 부분에서 이성적인 부분으로 빠르게 전이되면서 언어적인 교환이 어려워지는 상황으로 변화되었다. 형태주의는 시대적으로 뒤떨어지는 이미지를 갖게 되고 기능주의가 시대를 반영한 최첨단의 형태로 자리매김하면서 새로 생긴 형태에 대한 이해가 수반되지 않으면 공유가 불가능한 시대가 된 것이다. 

 

근대는 감성적인 제1의 형태를 멈춰 세웠고 특히 서민의 형태라는 이점이 더욱 대중 속으로 파고드는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서민들은 소외된 디자인 일색이었던 근대의 형태를 진심으로 반겼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제1의 형태와 제2의 형태 사이의 큰 차이는 바로 장식이다. 그리하여 포스트 모더니즘은 감성적인 대화를 다시 시도하려는 의도였으며 이것이 포스트 모더니즘의 진미이다. 

 

모던이 독자적으로 주를 이루던 시대가 지나고 클래식한 형태가 등장하면서 건축가들은 이 두 가지의 부류에서 하나를 선택 하든, 그렇지 않든, 아니면 두 가지를 병행하든 분류를 당하는 입장이 되었다. 시대에 뒤떨어진 선이라는 기준이 사라지고 취향에 대한 대등한 입장이 형성된 것이다. 

 

로버트 벤투리를 포스트 모더니즘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데 그는 건축을 배우면서 현대 건축의 단점을 깨닫게 되었는데 특히 그 엄격한 기능, 획일적인 부분, 장식의 부재 그리고 건축물이 가진 도시의 역사와 문화를 무시한 설계 방식에 대한 모순으로 현대 건축에 대한 흥미를 갖지 못했다. 그러던 중 <건축의 복잡성과 모순>이라는 저서에서 건축물에 적합한 특성 있는 재료와 역사적 암시의 의미적 사용, 그리고 건물을 흥미롭게 만들기 위한 비례 및 규칙을 제안했다.

 

동시대에 이탈리에서 알도 로시는 전쟁 중 파괴된 이탈리아 도시와 건물들이 원래의 거리 계획 또는 도시 문화를 무시한 상태로 이전 건축 역사와 아무런 관련 없는 모더니스트 스타일로 재건되는 것을 비판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등장은 모더니스트들에게 충격을 안겨주었다. 모던 이전 역사주의 배경은 군주제와 연결되어 있어 사회적 불평들을 야기하던 시기였는데 특히 장식이라는 요소가 건축의 영역에서 차지하는 역할이 컸다. 모더니스트들은 이를 권위적인 이미지로 여기며 상당히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네오 모더니즘

과거의 장식은 종교적인 교훈을 담거나 아니면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기득권자의 권위를 도와주는 이미지와 같은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러나 새로운 모던은 장식을 표현하되 의미가 없는 장식, 즉 형태 속에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형태와 형태가 서로 융합하지 않아 쉽게 읽히지 않는 것, 안정된 형태보다는 공격적이거나 폭발하는 듯한 형태, 불규칙성을 닺는 불협화음, 일정한 주제를 나타내는 형태적인 장식, 시간적 흐름을 담고 있는 기억의 흐름, 추상적이면서 회화적인 파괴, 비장소성, 일정한 기능의 파괴 등 고정된 사고를 갖지 않고 일정한 틀에 있지 않은 기능의 파소고 등 새로운 시도를 하게 된다. 이는 역사적인 건축물이 갖춘 안정감과 규칙 그리고 비례에 대한 반항처럼 작용한다. 그리고 이를 새로운 모더니즘, 즉 네오모더니즘이라고 한다. 

 

네오모던의 대표적인 건축물인 베르나르 추미의 라 빌레트 공원과 같이 완성과 명확한 표현이 없다는 것, 그리고 구체적인 설명을 주지 않는 것은 답답할 수도 있겠지만 느낌의 자유라는 해방감도 느낄 수 있다. 이것은 네오모더니스트들이 추구하는 것이다. 명확한 포스트모더니즘처럼 그 소재의 근거를 불러올 수 있고 역사적인 뿌리를 보여주는 것은 오히려 그 작품을 하나의 테두리 안에 가두어 두는 것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단지 이해를 구하는데 필요한 요소라면 이해를 구하지 않는 부류들에게는 분명한 공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베르나르 추미의 라 빌레트 공원

스마트 건축

과거에는 설계과정에서 동선을 고려하여 공간 배치를 고민하고 이에 따라 환기를 위하여 개구부의 배치 선택과 구조에 따른 공간 나누기, 방위에 따른 공간의 종류를 분류하여 배치하였으며 개구부의 성격, 창의 크기와 배치를 고려하였다. 또한, 배치도, 평면도, 입면도 그리고 단면도 등 2차원적인 작업이 선행되고 이 과정이 완료된 후 투시도나 조감도 등을 작업했다. 이는 건축물의 외형을 이해시키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3차원적인 투시도 또는 조감도를 먼저 작업하고 내부 공간의 배치와 공기 순환, 내부로 유입되는 빛의 작용 등을 3D 작업을 통하여 먼저 시뮬레이션을 거친 후 이것이 목적한 바를 얻게 되면 비로소 2차원적인 작업을 하게 된다.

 

컴퓨터 프로그램은 공간의 상세한 상황뿐 아니라 특수한 재료를 사용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문제까지 다양한 경우를 예상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이는 설계 작업뿐 아니라 또 하나의 혁신을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 바로 IT와 설비 분야이다.

 

더운 지방은 열기를 적게 받기 위해 흰색을 사용하고 지붕의 면적을 줄이거나 둥글게 한 반면, 추운 지방은 어두운 색을 사용하고 지붕의 면적은 넓게 벽은 두껍게 하여 추위에 대비하고, 눈이 많이 오는 지방은 지붕에 눈이 쌓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경사를 많이 주는 등 지역적인 단점을 보완해 나가기 시작하여 지역적인 특색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추운 북쪽으로 자주 사용하지 않는 공간을 두어 온도에 대한 완충 기능을 하도록 하고, 직접적인 해가 들어오는 남쪽에는 가든을 두어 간접적인 빛을 사용하여 에너지를 절약하는 등, 아무리 IT 기술이 발달해도 이러한 공간 배치는 쾌적한 공간을 만드는 데 필요하다.

 

즉 쾌적한 공간을 위해 IT기 기술이 전적으로 돕는다는 개념이 아닌 편리한 생활 방식을 영위하는 데 있어 IT 기술이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렇게 건축물은 설계, 설비 그리고 IT에 의한 자동화 시스템 등으로 변화하면서 건축가에게 새로운 능력을 요구하고 있다. 설계자의 부족한 인식을 건축물이 채우는 방식으로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제4차 산업혁명, 인간의 자리를 빼앗긴 시대?

스마트 건축은 편안한 환경을 만들기 위해 출발했지만 이제는 IT가 점차 주축이 되어가는 경향이 보인다. 역사를 살펴보면 고대에는 인간이 신인동형으로서의 역할을 했지만 이는 아주 미세한 부분이었다. 그리고 중세는 기독교 시대로 신본주의였고 인간은 배제된 시기였다. 그 후 근세는 인본주의라고 부르지만 사실은 신인동형이 다시 도래한 것이다. 그러나 고대와는 다르게 인간의 역할이 많은 부분을 차지했던 것이 사실이다. 

 

근대에 들어서면서 인간은 다시 그 자리를 뺏기고 기계가 그 자리를 차지한다. 그리고 IT가 등장하면서 인간은 자리를 찾지 못하게 된다. 지금은 AI 또는 ICT 시대이다. 첨단 기술이 신을 대체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IT가 인간의 활동 범위를 대신 수행하면서 인간에게 필요한 공간들이 사라지게 되었고, 이는 점차 건축의 변화로 이어졌다. 가상현실과 증강현실이라는 개념의 등장으로 우리가 현재 가진 대상과 환경이 무의미해진다. 이는 건축공간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어 e-북과 같은 시스템의 정착으로 책장과 같은 가구는 사라지게 될 것이다. 설계 또한 지금처럼 힘들여 작업하지 않고 원하는 데이터를 입력함으로써 많은 샘플 중에 선택하는 시대가 곧 올 것으로 여긴다. 이제는 데이터와 인간의 공동 작업을 통하여 이뤄지는 시대가 될 것이다.

 

과거 독일에 산업혁명이 시작될 때 규격화의 필요를 주장한 헤르만 무테지우스와 예술의 자유를 주장한 앙리 반 데 벨데 가운데 논쟁이 벌어졌다. 독일은 결국 규격화를 선책하고 유럽의  다른 나라와 차별화를 시도함으로써 산업혁명의 늦은 출발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게 산업화를 일구었다. 지금 제4차 산업혁명에 있어서는 독일이 그 규격화를 바탕으로 선두에 있다.

 

건축은 사실 종합예술이라는 취지 아래 산업형태를 빠르게 받아들였고 이를 적용해 왔다. 하지만 그 변화들을 모든 사람이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으며, 산업형태의 변화에 맞는 속도를 따라간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시작하는 산업혁명은 우리의 선택과는 무관하게 변화하고 있으며, 우리의 선택 또한 많지 않다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에 대한 선택은 온전히 우리의 몫이다.

4| 마무리하며

사라짐은 새로운 변화이다

근대 양식은 크게 근대 이전과 이후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근대 이전은 조직화된 상류층의 움직임하에 이루어졌다면 이후는 자본주의의 등장과 함께 후원제도가 무너지면서 개인적인 역량이 나타나는 시대였다. 탄생을 해야 죽임이 따르고 나타나야 사라짐이 있다. 근대 이후는 기술이 급속도로 발달하면서 이전보다 더 많은 양식이 쏟아져 나오는데 이는 더 많은 것들이 사라지고 있다는 의미도 있다. 즉 새로운 시도가 언제나 성공하지는 않지만 살아남은 것들이 미래를 앞당기는 데 지대한 영향을 주고 있는 것이다. 그중 하나가 바로 해체주의 양식이다. 이는 곧 우리 머릿속에 있는 고정관념을 해체한다는 의미로 모든 건축이 수직과 수평 그리고 읽히는 단순한 형태를 탈피하는 것으로 새로운 고딕의 해체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포스트모던의 선두 주자 찰스 쟁스는 해체주의를 퇴폐적인 양식이라고 정의 내렸지만 이는 후대가 결정할 문제이다.

 

스위스 건축가 가디온은 모든 현상에는 일시적 사실(유행)과 구성적 사실(양식)이 있다고 한다. 일시적 사실은 탄생했지만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사라지거나 역사 속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그러나 구성적 사실은 살아남아 미래로 가는 또 하나의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것이다.

 

급변하는 제4차 산업혁명시대인 요즘 우리는 변화보다 안정의 구성적 사실을 추구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코닥이 도무가 디지털카메라를 외칠 때 홀로 필름 카메라의 매력의 고수하면서 지금까지 독보적인 기업으로 남아있는 것처럼 말이다. 

양식을 부정해도 양식이 아닌 것은 없다

르 코르뷔지에는 양식이란 귀부인의 머리에 꽂힌 깃털과 같다고 했다. 이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왜 양식을 알아야 하는가. 양식은 마치 수학 공식 같이 우리가 형태를 만들 때 필요한 공식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모더니스트들은 양식처럼 틀에 박힌 규칙을 부정했다. 그런데 우리가 만드는 건축물의 형태는 어느 양식이든 한 부류에 속해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반드시 양식이라는 규칙을 따라 건축 형태를 만들자는 의미가 아니라 기존의 양식을 알아야 양식을 만들 수 있고, 그 양식들에 속하지 않은 것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모든 것은 양식이다.

 

모더니스트들이 양식을 부정한다고 해서 그들이 만든 것이 양식이 아닌 것은 없었다. 그들이 주장하는 국제양식도 양식이었다. 이 책은 내가 디자인한 형태가 어떤 양식에 속하는지 속하지 않는지 알아간다는 데 의미가 있다. 모더니스트들에게 기준을 맞춘다면 양식의 파괴이지만 포스트모더니스트들에게 양식은 또 하나의 디자인이다. 피터 아이젠만이 디자인한 주전자를 놓고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퇴폐적이라고 평가했다. 이렇게 자신이 추구하는 디자인 방법에 따라서 가치 기준을 다르게 정의할 수 있는 것이다. 디자인의 생명은 다양함에 있다. 

나의 생각

AI의 출현과 함께 그 어느 때보다 다양해진 디자인 방법론, 그리고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빨라지고 있는 유행의 사이클 속에서 이책은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건축 양식과 그 배후의 역사를 서술하며 양식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현대 미술에서도 이제는 단순한 시각적 자극보다는 작품 배후에 숨어있는 철학에 귀 기울여야 하는 시대가 도래하였다. 표면을 들춰 그 안에 본질을 추구하는 것만이 일시적 사실에서 구성적 사실로 전환되는 방법이라 생각된다. 더는 양식이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탈양식의 시대에서 미래는 어떻게 변화할 것인지, 변화하는 세상에서 역사 속 자신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것들의 매력은 무엇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며 이 글을 마무리한다.